나무이야기

나보중(羅甫重)과 김제 팔효사 은행나무

이정웅 2010. 8. 21. 06:50

 

 나주인 보중이 심었다는 수령 550여 년의 은행나무(전남 기념물 제 89호)

 팔효사와 은행나무 후손이 벼슬을 하거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북을 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하여 현고정이라고도 불린디

 팔효사의 위패가 모셔진 팔효사 현판

 팔효사 비

 팔효사를 기리는 백원재

 

나보중(羅甫重)과 김제 팔효사 은행나무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는 말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는 우애가 있어야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벗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시점에서 보면 다소 걸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만큼 충(忠)을 주권(主權)으로 바꾼다면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말은 성리학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때에는 가장 큰 덕목이었다. 특히 효(孝)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인간이기에 실천 가능한 능력이라고 하여 더 높은 가치를 매겼다.

그러나 이러한 절실하고 분명한 당위에도 불구하고 효도는커녕 어버이를 유기하는 패륜이 수시로 일어나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따라서 예나지금이나 효행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은 물론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 포상도 했다.

전라남도 김제에는 3대에 걸쳐 8명의 효자가 배출되어 그들을 기리는 사당 팔효사(八孝祠)가 있다. 한 가문에 한 명의 효자만 배출되어도 영광이라고 하는데 3대라는 짧은 기간에 모두 8명의 효자를 배출했다는 것은 지역의 차원을 넘어 나라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공간을 토박이 개인택시 기사가 찾지 못할 만큼 잊혀 진 곳이어서 방문자를 씁쓰레하게 했다.

주인공은 명문 나주 나씨로 시조 나부(羅富)는 중국의 강서성 사람이다. 고려조에 귀화하여 벼슬이 감문위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이르렀다.

그들이 본관지 나주로부터 김제에 뿌리를 내린 것은 5세 나석(羅碩)부터라고 한다. 금양군파의 파조(派祖)이기도 한 그는 학문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고려에서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으로 나라에 공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으로 봉군(封君)되면서 김제로 거처를 옮겨 소위 김제파(金提派)를 이루었다.

팔효의 단초는 9세 나보중(羅甫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통훈대부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를 지낸 희노(希老)의 4남이다. (족보에는 사포시(司圃寺)라고 되어있으나 ‘사포서’가 맞는 것 같다.) 사포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과일이나 채소를 생산하던 농장을 관리하든 기관이고 별제는 종6품이나 정6품의 벼슬이다.

나보중은 성균 생원으로 문장이 출중하고 행의(行誼)가 돈독해 주변 사람들은 진사로 불렸다. 김제파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고 장차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려는 뜻이었던지 한 그루 은행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89호)를 심었으니 그 염원이 하늘에 닿아 이후 효자가 쏟아져 나와 나문(羅門)을 반석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 역시 4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안세(安世)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1507년(중종 2) 대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올곧은 선비들이 무참히 화를 입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껴 낙향했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주야로 약을 달여 간병했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마침내 돌아가시자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시묘했다.

그가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상복(喪服)을 입지 못했다. 그 것이 한이 맺혀 다시 상복을 입고 시묘했다. 이 때 묘소 주변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져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가 잡아서 깨물며 하늘을 우러러 애통해하자 벼락이 내려치고 천둥소리를 내면서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송충이가 모두 떨어져나가 나무가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효제충신이라는 네 글자를 남기고 죽으니 주변에서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하여 효행을 추천하여 효자가 되었다.

그와 아우 나안인(羅安仁), 나안의(羅安義) 등 1세대 3형제와 나안세의 장자 나응허(羅應虛), 둘째 아들 나응삼(羅應參) 2세대 2명 그 다음 나응허의 둘째 아들 나의(羅扆), 나응삼의 맏아들 나표(羅表), 나안세의 셋째 아들인 나응정(羅應井)의 둘째 아들 나계(羅稧) 등 3명이 3세대로 모두 8명의 효자가 배출되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거나 벼슬을 받았다. 이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던 만큼 1629년(인조 7)이들을 기리기 김제 신풍동 내기 마을에 지은 것이 팔효사(八孝祠)다.

순조 때 후손 나한명이 흩어진 자료를 모아 팔효자의 행적을 적은 <팔효집(八孝集)>를 내고 그 역시 효자로 이곳에 추배되었다. 이로서 팔효사는 이름과 달리 9명의 효자를 기리는 공간이 되었다.

팔효사 경내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550여 년으로 나보중이 젊은 시절 심은 것이다. 후손 중 벼슬을 하거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북을 걸고 치면서 잔치를 열었다고 하여 현고정(懸鼓亭)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효자 나응허의 3년 상중에는 열매가 부실하게 열렸다가 제를 마치자 원상으로 돌아오는 이적(異蹟)을 보였다고 한다.

팔효자의 행적을 적은 유인물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서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