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마곡사 대광보전 경내에 있는 무궁화 1946년 4월 하순 백범선생이 마곡사를 찾아 향나무와 무궁화 1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향나무는 지금까지 수세가 왕성하게 잘 자라고 있으나 무궁화는 죽었는지 그 후 누가 새로 심은 것 같다.
활짝 핀 무궁화
수세가 왕성한 백범선생이 손수 심은 향나무
향나무 안내판
당시 기념사진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은거하며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던 곳
그락교
대광보전
백범 김구 선생과 공주 마곡사 무궁화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년, 한국동란 60년을 맞는 해를 맞아 공주 마곡사를 찾은 일이 있었다.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흉탄으로 돌아가신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가 손수 심은 무궁화와 향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그러나 그 뜻을 헤아려 심고 가꾸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말로는 애국을 외치는 위정자도 그랬다. 백범은 달랐다. 나라가 좌우와 남북으로 분열되고 혼란에 휩싸였던 1946년 마곡사를 찾아 무궁화와 향나무를 심으며 난마(亂麻)처럼 얽힌 정국을 풀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공주 시내에서 마곡사 행을 타려니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먼 길을 찾아간 필자에게는 무척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후에 꽃잎이 오므라드는 무궁화의 특성상 만개한 꽃을 보지 못하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마곡사 입구의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백범이 마곡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진남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을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인천 감옥(監獄)에 수감 되었다가 1898년(고종 35) 탈옥하여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백범은 이곳에서 하은당을 은사로 출가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새로 구성되고 의병 활동이 전개되는 등 나라가 급박(急迫)하게 돌아가자 불경만 읽기에는 큰 뜻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환속했다. 다시 마곡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
“1946년 4월 하순에는 마곡사를 찾으셨다. 정태훈씨가 모는 차를 타고 엄항섭 선생과 내가 수행했다. 공주에 도착하자 지방경찰청장과 경찰서장이 나와 선생을 모시고 공주군민 환영회로 안내했다. 많은 군중이 모인 감격적인 환영회였다. 환영회를 마치고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유학자 고 김복한(金福漢) 선생 댁에 들려서 영정에 배알하고 준비된 점심을 드시고 떠났다. 그 댁 총각들은 그때까지도 전부 머리를 깎지 않고 땋고 있었다. 그리고 마곡사(麻谷寺)에 들렸다. 잘 알려진 대로 마곡사는 백범이 인천 감옥을 탈옥한 뒤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수계(受戒)를 받고 여러 달 승려 생활을 한 곳이었다. 마곡사 승려 수십 명이 공주까지 환영 나와 있었다. 마곡사 입구부터 승려들과 한국독립당 사곡지부 당원들, 그리고 인근 사람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근 50년 만에 마곡사에 오시는 선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국독립당 사곡지부장은 선우영거(鮮于永巨)라는 분으로 나와 종씨가 되어 기억에 남는다.
선생은 절에 들어가시다가 못에 피어있는 수련을 한참 동안 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선생은 자신이 삭발했던 냇가의 바위도 살피면서 5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는 마곡사를 돌아보았다. 선생은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이 그때 그대로라고 하셨다.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글귀였다.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고 감회를 밝힌 바 있다. 절에서는 밤에 선생을 위해 큰 제를 올렸다. 선생은 50년 전에 불경을 배우던 염화실이라는 방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마곡사 경내에 향나무와 무궁화 1그루씩을 기념 식수하고 떠났다.”
이상은 백범의 비서 선우진(鮮于鎭, 1922~2009)의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에서 옮겨온 글이다. 경내에 발을 들어 놓자마자 우선 무궁화부터 찾았다. 꽃이 많이 피는 8월이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활짝 핀 무궁화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범당 앞에 있는 향나무와 달리 마당 끝 냇가 가장자리에 1그루도 아니고 7그루였다. 크기와 굵기도 심은 해에 걸맞지 않게 작았다. 향나무처럼 안내판도 없었다. 백범이 심은 것이 죽자 누군가 그 의미를 되살리려고 새로 심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심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절에 흔하게 심는 나무가 아닌 만큼 백범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17년 다시 찾았을 때 향나무는 크게 잘 자란 데 비해 무궁화는 관리가 더 부실해저서 잡다하게 심겨 있는 다른 나무들과 구별도 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조경수로 그냥 아무렇게 심은 무궁화라도 잘 가꾸는 것이 국민 된 도리일 터인데 한평생을 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이 직접 심은 나무라면 더욱더 잘 보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또 잘 건사하고 있는 향나무도 백범의 손때가 묻은 나무지만 무궁화는 나라꽃이고 유독 마곡사에 심었다는 것은 절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다. 수형이 불량한 무궁화는 뽑아내고 정부가 정한 단심(丹心) 계통의 무궁화를 향나무 가까운 곳으로 이식해서 승보(僧寶)처럼 자랑거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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