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강원도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을 찾아 심은 기념식수 수종은 노간주나무다.
노간주 나무의 줄기
기념 표석 2008 7, 21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노간주나무의 앺과 열매
기념식수를 둘러보는 탐방객들
한국자생식물원(23,00여 자생종 보유)의 김창렬 원장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국자생식물원의 노간주나무
우리정서가 살아 숨쉬기도 하지만 관상적으로도 아름다운 우리 꽃 즉 야생화가 한 때 외면당한 적이 있었다. 특히 어느 도시할 것 없이 공원이나 녹지에 팬지, 사루비아, 페튜니아 등 외국 꽃을 심어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화기(花期)가 길지 않는 점, 공해에 약한 점, 화려하지 않는 점 등 부적절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도시를 가꾸다 보면 장차 우리사회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마저 서양 꽃을 우리 꽃으로 오인하여 정체성에 큰 혼란을 초래하게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눈에 익은 팬지나 페튜니아가 우리 꽃인 줄 알고 정작 우리 산하의 주인공인 우리 꽃은 보잘 것 없는 잡초쯤으로 여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였다.
외국어가 아무리 필요한 사회라고 하드라도 우리글을 먼저 배우고 외국어를 배워야 하듯이 우리 꽃 야생화를 먼저 알고 외국 꽃을 알아야 한다. 이런 폐단은 꽃에서만 나타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서도 마찬 가지인데 가장 한국적이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을에도 외래 수종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국제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고루한 생각이라고 비판하겠지만 전통건축이나 문화유적지만이라도 우리 꽃이나 나무를 심자는 것 이다. 우리가 우리 꽃이나 나무의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 사이에 일부 국가에서는 몰래 우리 꽃이나 나무를 가져가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 그 제품을 우리가 역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여 년 전 한 젊은 청년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깊은 산골에서 우리 꽃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었으니 ‘한국자생식물원(1999년 개원, 산림청지정 사립식물원 제1호)’ 원장 김창렬님이다. 하도 힘들어서 다시 이 일을 하라고 한다면 포기하겠다고 할 만큼 힘든 작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원장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꽃의 우수성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외국인들에게도 당당히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김원장이 한창 야생화에 미쳐(?)있을 즈음 나는 대구시의 조경실무자였다. 때마침 전국체육대회가 대구에서 개최되었고 다른 시도(市道)에서 오는 소님을 맞이하게 되어 대구를 아름답게 가꾸는데 내 실력을 발휘해할 기회가 되었다.
우선 다른 도시와 차별화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우리 꽃 즉 야생화를 심기로 하고 자원을 조사하는 과정에 김원장을 알게 되었다. 정상적인 유통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거래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규격화가 되지 않아 거래 단위를 산정할 수 없었던 점, 거래 품목이 조달청 물가지에 등재되어 있지 않는 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몇 가지 행정적인 개선책을 제안하여 오늘 날 우리 꽃이 식물자원이 상업화하는데 일조했다.
이런 인연으로 지금도 나는 한국자생식물원을 가끔 찾는다. 그 때 마다 달라지는 모습에 흐뭇해하고 있지만 공사의 일로 바쁜 원장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는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안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심은 노간주나무를 볼 수 있었다.
노무현(盧武鉉, 1946~2009)은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로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출생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로 1년 남짓 재직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후 인권 관련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권변호사’가 되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어 정치권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3당 합당에 반대해 탈당하였으며 국민의 정부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여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되었으나 이듬해 새천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인권향상,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타파, 국가균형발전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언론과의 마찰, 기존정치세력과 불화를 겪으면서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되어 대통령 권한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다.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고향 봉하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포괄적 뇌물죄 혐의로 조사받던 중 자살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상이 노 전 대통령생애의 간략한 기록이다. 주로 소의 코뚜레로 사용했던 ‘노간주나무’를 기념식수로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김원장의 뜻이며 나무 중에서 앞 글자에 ‘노’ 자가 들어간 나무라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지가 잘 굽으면서도, 근본을 잃지 않는 나무의 성질이 노 전 대통령을 닮았다고 할 까. 서거 10개월 전 이곳에 와서 김원장이 이루어 놓은 식물원을 둘러보면서 봉하마을에도 이런 식물원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白松처럼 시들지 않는 秋史의 혼이여… (0) | 2010.09.13 |
---|---|
임경당 김열과 율곡 이이선생의 호송설 (0) | 2010.09.06 |
백범 김구선생과 공주 마곡사 무궁화 (0) | 2010.08.25 |
나보중(羅甫重)과 김제 팔효사 은행나무 (0) | 2010.08.21 |
화순인 최영경과 산청군 산천재 수우송(守愚松) (0) | 2010.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