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저 白松처럼 시들지 않는 秋史의 혼이여…

이정웅 2010. 9. 13. 16:53

저 白松처럼 시들지 않는 秋史의 혼이여…

충남 예산 탐방 '歲寒의 의미, 추사를 묻는다'
'우상' 옹방강의 저술·글씨 서재에 모으고 바위에 새겨
"추사체 만들어내느라 벼루 10개, 붓 1000개 닳아"

조선후기의 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는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이 특징인 추사체(秋史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외척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던 19세기 조선에서 학자와 예술가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주최하고 문학사랑·한국도서관협회·대산문화재단이 후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 열 번째 탐방은 추사의 예술세계와 이면의 아픔을 따라가는 '세한(歲寒)의 의미, 추사를 묻는다'였다. 온종일 보슬비가 따라다닌 궂은 날씨였지만 100여명의 탐방단은 11일 추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을 찾아 추사기념관~추사고택~월성위김한신묘~화순옹주홍문~백송~추사묘~화암사~예산도서관~수덕사(성보박물관)로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추사를 가슴 깊이 새겼다.

추사는 끝없는 여행을 통해 학문을 이룬 인물이었고, 길에서 얻은 지식을 귀하게 여겼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도 200여년 전 추사처럼 길을 걸으며 산과 바위를 보고, 글씨와 그림을 읽었다. 첫 탐방지인 추사기념관은 청나라 금석학의 대가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존숭했던 추사의 학문관을 그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추사 전문가인 고문헌연구자 박철상씨는 '보담재(寶覃齋)'라 새긴 추사의 인장(印章)을 가리키며 "연예인을 좋아하는 요즘 10대처럼 추사도 어릴 때부터 옹방강의 저술과 글씨를 서재에 모아두었고, 서재의 이름도 옹방강의 호인 담계(覃溪)에서 따왔다"고 설명했다.

추사 김정희는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백송(白松)의 씨앗을 가지고 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이 추사가 심은 백송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탐방단은 이어 추사의 옛집, 증조부모인 김한신과 화순옹주를 합장한 월성위김한신묘,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려 정조가 하사한 화순옹주 홍문, 추사가 중국 연경에 다녀오며 갖고 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어 지금껏 하얀 자태를 뽐내는 백송(白松), 추사고택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추사묘 등도 꼼꼼히 둘러봤다. 추사고택 뒤쪽으로 20분쯤 산길을 걸어 올라간 곳에는 법당과 요사(寮舍)채만 있는 작은 절 화암사(華巖寺)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 절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한 추사는 1846년 제주도에 유배 가 있을 때 '무량수각(无量壽閣)' '시경루(詩境樓)'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보낼 만큼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화암사 뒤 우람한 병풍바위에는 추사가 40대 때 각자(刻字)한 '시경(詩境)' '소봉래(小蓬萊)'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란 큰 글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글귀들은 모두 옹방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옹방강 추모의 완성판"이라는 박철상씨의 설명에 탐방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사 김정희의‘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
탐방단은 인근 예산도서관에서 추사의 '인재설(人才說)'과 추사 예술의 진수인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인재설'은 당시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이 경전 전체를 읽지 않고 주석과 시험용 어구풀이만 읽어 머리가 혼탁해진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편소설 '추사'(열림원)를 쓴 소설가 한승원(71)씨는 "족집게 과외가 난무하는 오늘날, 추사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5000권 이상의 책을 읽고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든 선생의 부지런함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철상씨는 "조선 지식인의 핏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의리와 절개를 누구나 느낄 수 있게 한 점이 바로 '세한도'의 위대성"이라고 설명했다.

탐방단은 수덕사 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돼 있는 '무량수각' '시경루' 편액을 감상하며 이날의 탐방을 마무리했다. 조재순(45·서울 잠원동)씨는 "추사가 글씨를 잘 쓴 명필인 줄만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한 글자를 써도 기교가 아니라 혼을 담아 쓴 분이란 걸 알게 돼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몇몇 중년 여성 참석자들은 백송 앞 잔디밭에서 발견한 네잎 클로버를 이름표에 끼워넣고 "이것도 '길 위의 인문학'과 추사 선생이 주시는 추억"이라며 소녀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