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7대 효종비 인선왕후가 친정아버지 장유의 명복을 빌기위해 심었다는 측백나무
측백나무의 줄기
측백나무 뿌리부분 썩는 부분을 인공수피로 보강했다.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법련사 대웅전 1989년 중창했다.
대웅전 현판 명필 한석봉의 글자다.
법련사 입구 표지석
인선왕후가 심은 시흥시 조남동 측백나무
스스로를 ‘보물창고’라고 했듯이 시흥은 옛 사람의 수식목(樹植木) 즉 심은 나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고장이다.
조선조 초 이름난 재상 문효공(文孝公) 진주인 하연(河演, 1376~1453)이 심은 느티나무가 있는가 하면, 역시 비슷한 시기에 문신으로 활동했던 같은 진주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선생이 1462년(세조 9)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오는 길에 남경(南京)의 전당지에서 연(蓮) 씨를 가져와 재배한 관곡지가 있고, 조선 후기 세계 최강의 나라 청(淸)을 치겠다는 야심만만한 임금,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가 친정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법련사(法蓮寺)를 짓고 그 곳에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나무는 인선왕후가 심었다는 측백나무다. 수령이 350여 년으로 전국에서 단목(單木)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많은 왕비 중에서 유일하게 수식목을 남겼기 때문이다.
인선왕후의 아버지 장유(張維, 1587~1638)는 조선 후기 이름난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호는 계곡(谿谷)이며 임란 시 이·형조판서를 지낸 장운익(張雲翼, 1561~1599)과 밀양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1609년(광해군 1)문과에 급제했으며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사우정(四友情)으로 불렸던 최명길, 조익, 이시백, 등과 더불어 4명 모두가 최고 관직인 정승에 오른 별난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으나 모시던 임금을 쫓아낸 일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며 일부 공신의 전횡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과 더불어 주화론(主和論)을 펼쳐 난을 수습하는데 이바지했다.
병자호란으로 평소 오랑캐로 불렀던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는데 따른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고 일부 중신들마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할 때였다. 따라서 명분에서는 척화파에 밀렸으나 떠돌며 굶주림에 떨고 있던 비참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유는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이 성리학 일변도로 공부하는데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명학(陽明學)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 태도가 한 때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천문지리, 의술, 병서, 그림, 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 이식, 이정구와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 또는 조선 문학의 4대가로 불렸다.
돌아가시기 1년 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사후 신풍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선왕후는 장유의 딸로 13살 때 1살 아래인 봉림대군과 혼인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8여 년 동안 볼모생활을 할 때 함께 지내다가 1645년(인조 23)귀국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되자 남편 봉림대군이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재위1649~1659)의 비(妃)가 되었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고,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려 했던 것에 비하면 봉림대군은 손쉽게 권좌에 올랐다.
볼모생활 중 절치부심(切齒腐心)했을 그가 선택한 정책은 북벌(北伐)이었다. 김자점 등 친청파를 몰아내고 김상헌, 송시열 등 친명파를 중용했다. 군사력 증강 등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농업생산력 증대, 상평통보 발행 등 내치 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재위 10여 년 만에 병사하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인선왕후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왜 측백나무를 심었는지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측백나무 단목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있는 단 1그루뿐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인선왕후가 심은 측백나무보다 수령이 50년 더 처질뿐만 아니라, 역사성이나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많은 왕비 중 유일하게 나무를 심고 그것이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이 나무밖에 없는 점을 감안하여 보호수보다 격이 높은 천연기념물로 승격시킬 필요가 있다.
먼 길을 물어물어 시흥을 찾았다. 수원에 내려 다시 전철로 안양 명학역에 내렸다. 버스를 타려다가 생각보다 저렴한 택시를 탔다. 그러나 그 역시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건 후에야 법련사를 알아낼 만큼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가을 햇볕을 받고 조용히 서 있는 측백나무를 보고 다시 소래산으로 옮겨 하연선생이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찾았으나 허사였다. 고사(枯死)된 것 같았다. 강희맹선생이 연 씨를 심은 관곡지일대는 연꽃테마파크로 조성되었다고 하나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국부(國富)의 뿌리, 진주 지수초등학교 재벌송 (0) | 2010.11.13 |
---|---|
추사 김정희선생과 예산 용궁리 백송 (0) | 2010.10.25 |
말라죽은 박정희 기념식수…문경초교에 45년전 심어 (0) | 2010.10.05 |
저 白松처럼 시들지 않는 秋史의 혼이여… (0) | 2010.09.13 |
임경당 김열과 율곡 이이선생의 호송설 (0) | 2010.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