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선생이 1809년 사신으로 북경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갔다가 씨앗을 가저와 심었다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추사 선생의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추사고택
추사고택 안채
추사 묘소 명성에 비하면 너무 간소하다.
추시 기념관
추사작품을 형상화한 벽화
추사 김정희선생과 예산 용궁리 백송
학문이 두텁지 못하고 지위마저 낮은 사람이라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결례될 것으로 생각되는 분이라서 그런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을 만나러 고택(古宅)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대전행 고속버스를 타고 동부터미널에 내려 다시 예산행을 갈아타고 거기서도 택시를 이용해야했기 때문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시간만도 4~5시간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5~6시간 왕복으로는 10~12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서예를 공부하는 것도, 금석학을 공부하는 것도 아닌 내가 이처럼 집착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언젠가 대구의 팔공산 동화사를 찾아와서 그 곳에서 오래 동안 주석을 하다가 고인이 된 정조의 사랑을 받았던 인악(仁嶽, 1746~1798)스님을 추모하는
스님의 오심은 한가로운 구름 무심히 피어남 / 스님의 가심은 외로운 학 한 마리 긴 울음
중략
어찌 칠분(七分)이나 닮았으랴. / 아득한 저 허공너머에서 마음으로 깨닫고 정신으로 만나리라.
라는 한 편의 시를 남겨 방손(傍孫)인 나로서는 잊지 못할 분이고, 다음은 1809년(순조 9)그가 아버지 김노경이 사신으로 북경에 갈 때 따라갔다가 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 자랐다는 수령 200여 년의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을 보기 위해서였다.
수피가 희기 때문에 이름이 백송(白松)으로 부쳐진 이 나무는 원산지가 베이징 등 중국북부지역이라는 점, 자연 상태에서 발아(發芽)가 어려운 점, 소나무가 잎이 2개, 잣나무가 5개인데 비해 3개인 점이 여느 소나무와 다르다.
최근 조경용으로 양묘한 것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백송 노거수는 모두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으며 분포지역도 서울, 경기, 충청으로 한정되어 있다. 모두라야 7그루뿐이지만 그나마 보은에 있던 것(제104호)은 고사되어 현재는 서울, 원효로(제6호), 재동(제8호), 수송동(제9호), 경기도 고양시(제60호), 이천시(제253호)와 충남 예산의 추사가 심은 1그루를 포함해 6그루뿐다.
추사는 1786년(정조 10) 아버지 경주인 유당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 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고조부는 정헌공(靖獻公) 흥경(興慶, 1677~1750)으로 한성부 판윤,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증조부 한신(漢藎, 1720~1758)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도총관, 제용감 제조(각종 직물 따위를 진상하고 하사하는 일이나 채색이나 염색, 직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수장 정3품)을 역임하다가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에 아내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르려하자 영조가 만류하였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훗날 정조가 정려(旌閭)를 내렸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전각(篆刻)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할아버지 정헌공(靖憲公) 이주(頤柱, ?~ 1797)는 대사헌, 대사간과 병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노경(1766~1840)은 대과에 급제 이, 예, 공, 형, 병조판서는 물론 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써서 아들 추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훌륭한 가문에 태어난 추사는 일찍부터 글씨를 잘 써서 6살 때 그의 입춘첩을 본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1819년(순조 19) 대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권력다툼이 전개되는 과정에 화가 미처 1840(헌종 6)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에 위리안치 되는 불행을 겪는다. 명문가의 후예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848년까지 무려 9년 동안 그는 제주도의 척박한 풍토와 매운 바닷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힘들었던 이런 거친 자연환경보다 하루아침에 권력에서 밀려나고 죄인(?)으로 몰린 그를 멀리한 지인들의 배신감이 더 외롭고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필법을 완성하고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00호)’라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3년 후인 1851년(철종 2) 이번에는 영의정이었던 찬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이번에는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안동 김 씨가 득세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56년(철종 7) 71세로 생을 마감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예산을 찾았다. 용궁리 묘소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나 간소했고, 고택은 수리 중이었다. 기념관도 잘 꾸며져 있었다. 먼 길을 갔었지만 선생이 뛰놀던 공간과 혼이 흐르는 백송(白松)을 만날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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