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대한민국 국부(國富)의 뿌리, 진주 지수초등학교 재벌송

이정웅 2010. 11. 13. 08:09

 LG그룹창업자 구인회와 SAMSUNG그룹 창업자 이병철이 심은 소나무 흔히 재벌송이라고 불린다.

 원래 2그루를 따로 따로 심었으나 1그루처럼 자라고 있다.

 3사람의 재벌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는 솥바위

 지금은 폐교가 된 지수초등학교

 교적비

 지수초등학교 교목 소나무

 

대한민국 국부(國富)의 뿌리

진주 지수초등학교의 재벌송

 

 

경상남도 의령군과 함안군을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남강에는 발이 세 개가 달린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이 ‘솥바위’로 부쳐진 즉 정암(鼎巖)이 있다.

현대식 다리, 정암교가 놓이기 전 정암진 즉 정암나루터는 의령과 함안 사람들이 오가며 물자를 교류하던 곳이자 임진왜란 때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창의한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1552~1617)선생이 왜군이 곡창지대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것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592년 5월 24일에 있었던 정암진 전투는 50여명의 의병(義兵)이 2,000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란 최초의 승리라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전투의 승리를 보고 의병의 참여가 늘어나 이후 전투에는 관군(官軍)이 힘을 덜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 왜를 몰아내는데 의병이 큰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의병이 40배에 해당하는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데에는 망우당의 탁월한 전략이 뒷받침되었다. 강의 남안에 당도한 왜군의 지휘관 안코쿠지 에캐이(安國寺 惠瓊)은 강을 건너기 위해 미리 정찰대를 보내 도착할 지점을 설정해 두고 통과할 코스를 쉽게 식별하기 위해 나무 팻말을 만들어 꽂아 두고 다음 날 강을 건너려고 했다. 전날 밤 망우당이 의병을 동원해 팻말의 위치를 도하(渡河)하기 어려운 늪지대로 바꾸어 꽂고 맞은편에는 의병을 매복해 두었다. 이튿날 왜군이 강을 건너려고 할 때 기습공격을 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정암에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전설이 있다.

정암의 세 발이 뻗친 팔 십리 내에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은 현실과 맞아 떨어져 실제로 의령군 정곡면에서는 세계적인 기업 삼성의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진주시 지수면에서는 역시 세계적인 기업인 LG창업자 연암 구인회(具仁會, 1907~1969), 함안군 군북면에서는 효성그룹 만우 조홍제(趙洪濟, 1906~1984)가 각각 출생했다.

호암은 1938년 대구로 거처를 옮겨 자본금 3만원으로 중구 인교동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여 국수공장을 차렸다.

이들이 설립한 기업은 재계 선두 삼성을 비롯해 LG, 효성 등 오늘날 한국경제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외국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현지인들이 한국은 몰라도 삼성과 LG는 안다고 할 만큼 글로벌기업으로 세계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재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한 노동운동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만난 원주민들이 두 기업이 생산한 제품에 대한 찬사를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연암과 호암은 공교롭게도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토박이 연암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 2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까지 다녔고, 집이 의령이고 연암보다 3살 어린 호암은 의령에서 역시 한학을 배우다가 1922년 편입 6개원동안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했다고 한다. 그는 누나가 지수로 시집을 와서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반으로 출석부 명단에 연암은 6번 호암은 26번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각기 한 그루의 소나무를 교정에 심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처럼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재벌송(財閥松)’이라고 부른다. 두 기업은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협력자로 갈등을 빚은 때도 있었지만 이러한 선의의 라이벌의식이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기업에 이르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아내와 딸, 며느리와 함께 모처럼 가족나들이를 진주로 정했다. 우선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이 서려있는 진주성을 찾아 촉석루에 올라 남강을 가운데로 아름답게 펼쳐진 진주 시가지를 보고 이어 평양냉면에 버금간다는 진주냉면으로 요기를 했다.

지수를 찾았다. 여느 시골이 다 그렇지만 이곳도 인구가 줄고 세계적인 기업의 창업자가 다녔던 학교도 폐교가 되었다.

교적비에 의하면 1921년에 개교한 이 학교는 모두 4,324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들 중에 호암과 연암은 물론 연암의 동생인 구철회 LG그룹 창업고문,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허준구 전 GS건설 명예회장, 연암의 장남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도 포함되었으니 지수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재계의 산실이었다.

우리 가족과 다른 일행이 없었다면 적막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교정은 텅 비어 있었다. 재벌송의 생육상태는 양호했다.

열 살 전후 꿈 많은 소년들이 심었던 나무는 이제 2층 교사(校舍)를 훌쩍 띄어 넘을 정도로 크게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