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산림전쟁 이야기

이정웅 2011. 1. 11. 18:38

 

[이규태 역사에세이] 산림전쟁 이야기

 

한말의 외부 교섭국 주사로 일했던 황우찬 옹을 찾아뵌 것은 30여년 전 일이다. 울릉도의 산림 벌채권을 두고 러시아가 호시탐탐하던 무렵의 실무를 보았던 황 주사다. 러시아 세력이 득세 할 때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 파브로프에게 벌채권의 언질을 주었고 산림벌채를 핑계로 남하의 전진기지로 삼으려한다 하여 일본 공사가 음양으로 방해를 하고 있던 때 일이다. 어느날 파브로프가 한 러시아 상인을 데리고 외부 관가를 찾아왔다. 조선 기와집인데도 장화발로 들어와 마룻바닥을 구르며 대신을 불러오라 호통을 쳤다. 난처한 사안이라 외부대신은 병을 핑계대고 출근하지 않았으며 담당 교섭국 국장은 때마침 황해도에 천주교난이 일어나 안무사로 떠나고 없는지라 황 주사가 이 무법자들을 감당해야 했다.


사진설명 : 서양사람들이 근무했던 낙선재 궁중전화교환소와 어용전화(오른쪽).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황실의 내시를 통해 황제에게 품신하기로 하고 황실로 통하는 전화 앞에 가 궁중으로 통화하는 데 필요한 예를 갖 추었다. 의관을 바로하고 도홍띠를 두른 다음 덕률풍을 행해 큰절을 네 번하고 무릎을 꿇었다. 당시 텔레폰이란 영어발음을 한역하여 전화를 덕률풍이라 불렀던 것이다. 공손히 두 손으로 수화기를 받들고 딸딸이를 돌려 왕실 교환대를 거쳐 어용전화와 연결시켰다. 한데 으레 이를 받아야 할 내시가 나오지 않고 황상폐하께서 직접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누구냐 하기에 자초지종을 여쭈었더니 '불손하도다. 외국공사를 외부에 들여세워놓고 짐을 협박하다니! 그것도 무엄하게 전화에다 대고-.' 대죄를 못 면하게 된 황 주사는 그의 선친과 친분이 있던 당시 황태자(순종)를 통해 벌만은 면하고 청양 현감으로 좌천돼 갔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울릉도는 그 섬이름처럼 아름드리 교목이 울창했었다. 압록 강변 용암포의 조차(조차)로 남하기지를 구축하고 산림벌채로 돈도 버는 데 맛들인 러시아는 보다 남쪽인 울릉도에 군함을 진주시켜 현지조 사를 했다. 그 무렵 울릉도에는 일본세력이 들어와 있는지라 이 현지 조사단을 안내한 것이 울릉도 거주 일본인이요, 이미 일본 공사관으로 부터 밀명을 받은 자인지라 요새 구축에 불리한 쪽으로 안내하고 다녔다. 하지만 압록강 용암포에서 재미를 붙인 러시아 상인은 이 울릉도에 벌채시설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인이 다름 아닌 블라디보 스토크의 무역상인 스위스계 러시아인 줄리어스 브리너였다. 대머리 배우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율 브리너의 직계 할아버지인 것이다. 바로 이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가 울릉도의 벌채권을 얻었고, 이 섬을 답사했던 장본인인 것이다. 물론 노일전쟁의 발발로 이 산림 제국주의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이 브리너 일가는 2차대전 종전까지 만주 하얼빈에서 살았으며 적군에 의해 브라디보스토크에서 억류생활을 했었다. 율 브리너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억류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어머니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일류 배우로서 아버지와 더불어 소련을 탈출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일간의 침략성 산림전쟁은 그 이전에 부산 영도를 두고도 벌어 졌었다. 남하기지로 영도를 욕심낸 러시아는 상투수단인 그곳의 나무 벌채를 핑계삼아 친로세력을 앞세워 영도의 사유지 수만평을 사들였다. 시가의 5배를 주고 샀다 하니 그 저의를 알아볼 만하다. 한데 그 이전인 1898년에 영도땅에 눈독을 들인 일본이 앞잡이 박영길 등 3명의 연서로 영도의 국유지에 대한 식림과 개간을 농상공부대신에게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이 배후 조종자가 부산에서 돈많이 번 세코마란 자요, 그 배후에 일본 공사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영도의 제국주의 산림 전쟁에서도 러시아가 패배하고 만다.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우리들 기억에 사라지고 있는 '사쿠라 정략'을 놓칠 수 없다. 을사조약으로 들어선 일본 통감부는 일본 국화인 사쿠라를 서울의 도심으로부터 심어나가 전국토를 덮게 함으로써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던 것이다. 창경원 남산 장충단 창덕궁의 사쿠라가 바로 이 정략의 일환이었다. 이 음흉한 사쿠라 정략의 저의를 알지 못했던지 순종황제께서 벚꽃이 곱다 하니 빨리 피우게 하여 볼 수 없느냐고 말했다 한다. 얼씨구나 하고 통감부 당국자는 묘목이 아닌 지름 4치 남짓한 큰 사쿠라나무 열 그루를 군함을 동원, 일본에서 싣고 와 황제가 거처하는 문전에 심었다. 이때 황제는 손수 뜰에 나와 심는 장소를 지적해주기도 했다 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궁중의 누군가가 이 열 그루의 나무에다 친일파 대신들의 직함과 성명을 적은 푯말을 걸어두어 한때 옥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궁중 사쿠라 이식으로 명분을 얻은 제국주의자들은 관아가 늘어선 광화문으로부터 팔도 도처에 심어나 간 것이다. 이 사쿠라 정략에 반감도 대단하여 심어놓으면 뽑아 없애 길 거듭했고, 이를 방지하고자 세 그루당 한 명의 책임경관을 두어 보호시키기까지 했다. 통감부의 당초 계획은 팔도의 모든 신작로의 가로수를 사쿠라로 할 셈이었으나 이 뽑아 없애는 저항에 굴복, 그 전국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13년 10월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윤선도의 유적지로 유명한 남해의 외딴섬 보길도는 황실재목을 기르는 국유림인 황장봉산으로 떡갈 동백 참나무 등 드물게 보는 목재가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을사조약 후 살판났다고 일본에서 건너온 왜인들은 하나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빈털터리였고 이들이 맨 먼저 노린 것이 톱만 있으면 당장에 돈이 되는 산림이었다. 이 보길도의 산림에 군침을 흘린 한 일본인 대의사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탄 후 이 일본인들의 산림 침략을 용이하게끔 산림법을 고쳐 대부조림이라는 미명으로 벌채를 허락했으며, 이를 놓칠 세라 이 일본 대의사는 대부조림을 위한 측량단을 보길도에 파견시켰다. 5명의 일본 사람으로 구성된 측량단이 보길도 면사무소의 숙직실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뜻하지 않았던 일을 당한다.


김모라는 60대 후반의 한 노인이 나서 보길도 산림은 김씨 일족의 묘소가 있는 문중산임을 주장하고 구법에 의한 지적도를 펴보였다. 보길도의 산림은 사유재산인 이상 상감님의 명령일지라도 따를 수 없으니 봉변을 당하지 않겠거든 측량기계 둘러메고 빨리 섬을 떠나라고 했다. 다음은 당시 이 보길도 산림측량에 참여했던 총독부 기사의 회고 담이다. '점심을 먹고 측량을 시작하러 산을 향해 걸어들어가자 주변 둔덕에서 흰옷 입은 섬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나와 순식간에 수백명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 가운데 김 노인이 하얀 수염을 날리며 자신의 키 만한 몽둥이를 휘두르며 "이 산봉우리에는 내 선조의 무덤이 있다. 어느 놈이건 올라오면 패죽인다"고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통역을 통해 고함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있는 동안 면장이 섬사람들을 달래려고 했으나 백의 군중은 이들 측량단을 바싹바싹 죄어들고 있었다. 측량을 감행하자느니 돌아가자느니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섬에서 고용한 측량 줄잡이가 줄을 놓고 민중틈에 가세했다. 돌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면장은 이들을 보호, 면사무소로 돌아왔는데 민중은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투석을 계속했다. 밤이 되자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워놓고 몽둥이와 농기구로 무장한 채 '왜놈 죽여라!' '도둑놈들 잡아 죽여라!' 하는 배일 구호를 외치며 밤샘을 하였다.


이 측량단도 면사무소에 상비해둔 야수방지용 총과 산탄으로 무장한 채 대치했는데 군중의 노기가 더해가고 이들을 말리는 면장이 얼굴을 할퀴어 피를 흘리고있었다. 이에 면서기 하나를 이웃섬에 있는 성관주재소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다른 한 면서기를 역시 대안에 있는 돼 지목섬(저항도)의 무선전신소에 보내 목포 수상경찰에 구원을 요청시킨 것이다.


목포의 수상경찰대가 도착한 것은 새벽 6시요, 이미 일행 중 두 사 람이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대구 경찰서장을 역임한 모 경부가 30여명의 무장경찰을 끌고 보길도에 상륙했을 때는 이 섬의 항일 군중은 산 속에 숨어버린 후였다. 경찰은 무고한 섬사람들을 샅샅이 잡아 수색을 하고 산속에 숨은 자를 잡는답시고 산에 들어가 사람 대신 멧돼지를 잡아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 김 노인이 가마를 타고 유유히 나타난 것이다. 김 노인은 이들 어리둥절하고 있는 경찰 앞에서 옷고름을 풀고 가슴을 노출시키며 '나를 쏘아죽인 다음 산을 떼어가든지 나무를 베어가든지 하라'고 호통쳤다. 질려버린 일본 경찰은 반항한 섬사람들을 검거하지 않을테니 이 측량을 방해하지만 말아달라고 했지만 김 노인은 파헤친 가슴팍을 여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일본 경찰은 김 노인을 감금하고 측량을 강행했으며, 그 수백년 지켜온 황장목들이 모조리 베어져 일본사람 뱃속에 들어쌓였고, 김 노인은 울화를 못 참아 몸져누워 그 길로 죽어갔던 것이다.


일본 침략의 전초전인 산림전쟁은 완도-삼척-진영-장흥-은율 등지에 서도 일어났으며, 모두가 일본 상인들이 애지중지 길러온 종중산과 마을의 수호산인 주산의 산림약탈에 대한 민중의 반항인데 공통되고 있다. 이 한국 근대사의 아픈 허리를 오늘에 더불어 아파보고 침략과 산림의 역사적 함수를 길이 남기기 위해 보길도에 김 노인의 사적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