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합천 묵와고택과 모과나무

이정웅 2011. 3. 24. 05:42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파평윤씨 화양입향조 윤장공이 심었다는 수령 600년의 모과나무

 

 

이른 봄 묵과고택의 모과나무

 모과나무 뿌리, 일부 고사한 부분이 있으나 그러나 비교적 수세가 좋다

 

 

수령 600년이라는 보홋수 표지석

 누마루가 아름다운 묵와고택 사랑채(중요민속문화재 제 206-2)

 꿀뚝을 낮게해 연기 나는 것이 외부에 퍼저 나가는 것을 줄이려고 했다고 한다.

 묵와고택의 안채 (중요민속문화재 제206-1)

 묵와 고택 현판

묵와 고택을 지키고 있는 황정아 여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합천 묵와고택과 모과나무

 

 

 

봄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고 하는 3월 초순, 우리 일행은 잘 생긴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 한 그루를 보기 위해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로 향했다.

88고속도로 해인사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야로를 거처 묘산면사무소로 가는 도로변에 소나무와 묵와고택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다. 조금 진입하니 길이 두 갈래였다. 이미 이곳을 와본 예근수님이 바로 가면 소나무가 있는 곳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묵와고택이 있다고 했다. 일단 처음 목표로 삼았던 소나무를 먼저 보고 내려오는 길에 고택을 둘러보기로 했다.

소나무는 찻길이 끝나는 곳 오른 쪽 아래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수령 400여 년, 수고 17.5m로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명품소나무가 틀림없다.

내려오는 길에 묵와고택을 찾았다가 또 다시 놀랐다. 이런 깊은 골짜기에 큰 규모의 고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안주인 황정아 여사였다. 명문 경북여고 출신이라며 대구에서 왔다니 더 반갑다고 했다.

묵와고택(黙窩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은 선조 때 선전관을 역임한 윤사성(尹思晟)이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대지 600평에 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거듭 퇴락하여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비워둘 수 없어 황 여사 내외분이 도시생활을 접고 귀향 했는데 좀 더 일찍 돌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안채(중요민속문화재 206-1호)를 거쳐 후원에 이르니 거대한 모과나무가 우리를 압도했다. 황 여사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뺏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 시 화를 입은 김종서의 사촌 처남이었던 입향조 윤장(尹將) 공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할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오래된 나무들이 다 그러하듯 줄기가 일부 썩었으나 아직도 수세는 강건하고 수고(樹高)도 20여m로 다른 모과나무와 달리 더 컸다. 천연기념물로도 손색없을 것으로 보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누마루가 아름다운 사랑채(중요민속문화재 제206-2호)에서 황 여사로부터 화양윤문의 내력을 잠시 들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굴뚝이 매우 낮고 어떤 것은 축대에 구멍을 뚫어 굴뚝을 대용했는데 이는 밥 짓는 연기가 멀리 나가는 것을 막아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화양윤문은 묵와 윤우(尹 木+禹, 1784~1836)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았던 같았다. 아버지 윤경목과 어머니 합천 이씨 사이에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기를 좋아해 거창에 거주하던 같은 윤문의 이름 높은 선비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로부터 글을 배웠다.

스승인 현와는 “장차 이 아이 때문에 내 이름은 필시 가려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1816년(순조 16) 공의 나이 33세 때 아버지 참의공이 돌아가시니 예법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비를 세웠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향의 묵산 문해구(文海龜, 1776~1849)와 더불어 이연서원(伊淵書院)에서 향리의 청년들을 모아 강론을 펼쳐 합천의 문풍 진작(振作)에 힘썼다.

어머님의 간청으로 과거에 응시 마침내 성균관 진사에 뽑히셨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재상(宰相)이 찾아와 승진을 도와주겠으니 뇌물을 쓰라고 하였으나 거절하며 분수대로 살겠다고 했다 한다.

그해 순조 임금이 돌아가니 슬픈 마음을 ‘문대행대왕승하통곡유감(聞大行大王昇遐痛哭有感)’이라는 시로 남겼는데 원문이 <파산세고(坡山世稿)>에 전해온다.

1836년(헌종 2) 유명을 달리하시니 향년 53세, 지천명을 불과 3년 넘긴 나이였다. 부인 해주 정씨와의 사이에 6형제를 두었다. ‘공은 덕성이 깊고 뜻이 높고 밝았으며 정정당당한 식견과 엄밀하게 지키는 법도는 실로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렵다’ 고 전한다.

공의 후손 중 근세에 두드러진 인물은 만송(晩松) 윤중수(尹中洙, 1891~1931)다. 만송은 3. 1독립만세운동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에 동참할 유림을 규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천석재산을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내 놓는 등 조국해방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 무순에서 왜경에 채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 병으로 영면하니 41세였다. 1990년<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