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10경
이정웅
들어가는 말
성주도씨 대구입향지인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는 용호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팽나무 노거수를 보러 갔다가 <용호서원유적지서제사적편합>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이를 통해 서원에 배향된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 1571~1649),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1574~1640), 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 1598~1650) 등 세분에 대한 생몰년도로부터 지낸 벼슬과 행적, 저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사항을 알았을 뿐 아니라, 특히 일대의 아름다운 10곳을 노래한 시문을 확보할 수 있어서 매우 뜻밖이었다.
서재마을을 포함한 강정, 죽곡, 이천, 박곡, 사수 등 다사지역 일대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지금과 같이 제방을 쌓거나 경작지로 활용하기 전에는 범람 시 큰 호수를 이루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와룡, 마천, 파산이 강 주위를 감싸 안아 경관 역시 수려해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말(羅末)의 학자이자 대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이 이 곳 마천산의 ‘선사암(仙槎菴)’에 머물면서 벼루를 씻던 못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운 역시 이곳에서 많은 시문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에도 원근의 많은 선비들이 서호 일대를 주유(舟遊)하며 시회를 열거나 시문을 지었으나 개인적이자 단편적인 작품일 뿐 전 지역을 대상으로 쓴 작품은 없다. 반면에 서호(西湖) 도석규(都錫珪, 1773~1837)는 일대를 함께 묶어서 ‘서호병10곡(西湖屛十曲)’을 남긴 점이 특이하다.
선초(鮮初) 사가 서거정선생이 대구 전 지역을 대상으로 ‘대구10경’을 노래한 것과 달리 ‘서호--’는 지역적으로 다사일대 즉 금호강 하류로 한정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19세기 초 이 지역의 경승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 점에서 자못 이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호(西湖)라고 하면 가까운 곳으로는 경기도 수원에, 멀게는 중국에도 있으므로 지역민이 알기 쉽고 ‘대구 십경’과 차별되게 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다사 십경’으로 부르기로 한다. 10곡 중에서 제2곡 이락서당은 달서구, 제9곡 관어대는 칠곡군, 제10곡 사수빈은 북구로 행정구역이 다르나 그 이외 7곳은 달성군 다사지역이다.
선사(仙査) 뱃놀이
서호에서의 뱃놀이는 17세기 초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대구지역 사람의 영수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 공부할 곳으로 선사암 옛터에 완락당(玩樂堂)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동(현 구미시)출신의 여헌 장현광을 비롯한 향, 내외의 일단의 선비들이 모여 뱃놀이를 하며 시회를 열었던 기록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형규(趙衡逵)라는 분이 1833년(순조 33)에 그린 그림<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가 현존하고 있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지주헌 이규문과 그의 아들 남촌 이윤원의 문집 <지주헌 일고 및 남촌유고>에 따르면 때는 임란이 끝난 3년 후 즉 1601년(선조 34)봄이었다. 23명의 선비들이 모여 중국의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출재장연중(出載長煙重), 귀장편월경(歸裝片月輕), 천암원학우(千巖猿鶴友), 수절도가성(愁絶棹歌聲)이라는 시구(詩句)에서 각자 한 글자 씩 나누어 시를 썼다.
승선자 |
호 |
득자 |
거주지 |
주요경력 |
서사원(徐思遠) (1550~1615) |
낙재 |
출(出) |
대구 |
한강 문인, 임란 의병장, 저서 낙재집 구암서원에 배향됨 모당과 함께 대구사림을 주도 |
여대로(呂大老) (1552~1612) |
감호 |
재(載) |
김천 |
한강 문인 1583년(선조 16)대과 급제, 성균관 박사 김천의병장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
여헌 |
장(長) |
인동 |
조선 중기의 학자,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연구, 사후 영의정에 추증, 시호 문강 |
이천배(李天培) (1558~1604) |
삼익재 |
연(煙) |
성주 |
정구의 문인, 유학자, 천곡서원 중창, 덕암사에 제향 |
곽대덕(郭大德) |
죽오 |
대구 |
임란 시 공산회맹에 참여, 죽곡에 사현재(似賢齋)를 지어 후진 양성 | |
이규문(李奎文) (1562~ ? ) |
지주헌 |
중(重) |
성주 |
19세 무과급제 부안현감 제직 시 창의, 안동, 종성 부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역임 선무원종공신 증 병조참판 |
장내범(張乃範) (1563~1640) |
극명당 |
장(裝) |
인동 |
한강, 여헌 문인, 임란 시 창의, 증 공조참판, 저서 <가례의절> 소암서원 배향(配享) |
송후창(宋後昌) (1563~ ?) |
고헌 |
귀(歸) |
성주 |
여헌 문인 창신교위 역임 |
정사진(鄭四震) (1567~ 1616) |
수암 |
편(片) |
영천 |
공산성 창의, 영천복성전투에 참전 왕자사부(師傅), 세마 시직, 선조원종3등공신 입암서원 배향 |
이종문(李宗文) (1566~1638) |
낙포 |
월(月) |
대구 |
계동 전경창의 사위, 1588년 사마시 합격, 팔공산 의병, 비안, 군위 현감 하목정 창건, 선무원종공신 |
정용(鄭鏞) (1567~?) |
경(輕) |
대구 |
한강, 낙재 문인, 임란 시 창의, 하빈 동면장(東面將) | |
서사진(徐思進) (1568 ~ 1645) |
천(千) |
대구 |
임란 시 창의, 학문연구와 자기수양에 전념 | |
도성유(都聖兪) (1571~1649) |
양직당 |
원(猿) |
대구 |
한강, 낙재 문인, 임란 시 창의, 용호서원 배향, 달성 십 현의 한 분 칠곡향교 건립 시 사재 희사, 저서 <양직당집> |
정약(鄭鑰) |
동헌 |
암(巖) |
대구 |
임란 시 창의 하빈 서면유사(西面有事) |
정수(鄭錘) (1573~1612) |
양졸재 |
학(鶴) |
대구 |
한강의 문인, 정용의 아우, 문명(文名)이 높았다. 40세에 요절하자 한강이 애통해 했음 칠곡 오양서원에 제향 |
도여유(都汝兪) (1574~1640) |
서재 |
우(友) |
대구 |
한강, 낙재 문인, 이괄의 난 시 손처눌과 함께 창의, 달성 십 현의 한 분 용호서원에 배향 마을 이름 서재는 그의 아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
서항(徐恒) |
대구 |
|||
정선(鄭銑) (1579~1644) |
이계 |
대구 |
정수의 아우 한강`낙재 문인 | |
서사선(徐思選) (1579~1650) |
동고 |
수(愁) |
대구 |
1613년(광해군 5) 생원 시 합격, 이괄의 난 때 창의, 유일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을 지냄, 옥천서원에 배향 |
정정(鄭鋌) (1575~1637)
|
이헌(伊軒) |
|
대구 |
동래정씨 이헌공파파조 족보 상 이름 정횡(鄭鈜) |
이흥우(李興雨) |
절(絶) |
칠곡 |
모당 문인 | |
박증효(朴曾孝) |
세심당 |
도(棹) |
영천 |
모당 문인 |
김극명(金克銘) |
반학정 |
가(歌) |
서울 |
모당 문인 |
출신지는 서울 1, 칠곡 1, 영천 2, 성주 3, 김천 1, 인동 2, 대구가 13명이었다.
감호 여대로의 선유록(船遊錄)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이천은 별장(別庄)의 이름이니 행보(行甫, 사사원의 자)가 거처한다. 행보가 하남(=성리학)의 학에 뜻을 두고 이천장에 거처하는 것은 지방의 거리가 천만리나 먼데, 하늘이 이 별장에 이 이름을 하도록 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천이 쉬지 않고 활기차게 흘러서 낙동강에 합친다. 이천과 낙강이 어찌 모두 한 지방에 모여서 행보의 분내물(分內物)이 되는 것인가. 덕회(德晦, 장현광의 자)는 행보와 뜻이 같은 벗이라, 마침 옥산으로부터 올새 따라 온 이가 많아서 여러 사람이 기약하지 않고 모인 것이다. 무이도가(武夷棹歌)의 흥을 따라서 선사 옛 절에서 뱃줄을 풀었으니 곧 유선(儒仙) 최치원이 옛날 놀던 곳이라 의회하게 도끼자루 썩은 자취가 있을 듯하다. 이날에 비가 조금 내리고 이내 개니 하늘과 구름이 물에 어림에 강둑의 꽃과 물가의 버들은 십리 장강에 잠기었다. 비단병풍 같은 물색이 모두 한 거울 안에 있다. 사미(四美)와 이난(二難)이 일시에 모두 갖추었으니, 인간 세상 백년에 한갓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다. 그 층암의 기이함과 넓게 뻗은 사장(沙場)이 멀리 연한 것은 그림이 아니고는 그 형상을 다할 수 없다. 황혼에 부강정에 배를 대니 정자는 윤 진사 대승(大丞)이 지은 것이라, 기와는 난리에 불타버렸고 진사가 죽은 지 아직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거친 대(臺)가 홀로 저문 비에 머무르고 빈 뜰에는 송죽의 그늘뿐이라서 나로 하여금 산양(山陽)의 느낌이 일도록 하는구나. 강촌이 저물어감에 그곳에서 쉬기로 되었는데 겨우 두어간 방에 여럿이 다 잘 수 없으므로 나와 사빈(士彬, 이규문의 자)은 학가(學可, 이종문의 자)의 집에서 자는데 날 밝기를 기다려서 제현이 추후로 함께 왔다. 새벽 구름이 비를 빚으니 나그네의 옷이 이슬비에 젖었으나 경쾌한 모습은 도사가 공중에 나는 듯하다. 배 안에서 출재장연중 이하 27자로 운을 내니 이것은 주회암(朱晦菴)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절귀라 제현이 서로 앞 다투어 짓고 읊은데 오직 이 진사 학가만이 도리원(桃李園)에서 글을 짓지 못한 사람같이 되어 벌주로 막걸리를 마시되 금곡주수(金谷酒數)에 의하였다. 덕회는 장(長)자를 얻었으되 다듬은 기가 없고 나도 여러 친구들이 욱박지름에 부득이 그 끝을 이어서 드디어 서로 큰 웃음을 웃고 파회했으나 작별의 한이 재촉되어 남은 정을 다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어질 때는 해도 이미 서산에 기울었다. 꽃다운 자취가 지났음에 즐거웠던 일이 꿈같구나. 어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점점 암연(黯然)할 뿐이다. 아! 10년의 병란에 몇 사람이 살았으며 비록 몇 사람이 살았다할지라도 서로 같은 소회를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심중으로 만나기를 기약한 이가 있으면 조물주의 마(魔)를 당하는 것이 예사이니 이는 세상에 유(留)하기가 어려운 일이고, 그 모임을 얻는다는 것은 또 더욱 어려운 일인데 이제 약속 없이 23인이 같이 모였다는 것이 어찌 인력으로 될 일인가. 그것은 수(數)에 있는 것으로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인지 알 수 없다. 본래 이합(離合)은 모이면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져서는 또 모이나니 한번 모이고 흩어짐이 모두 하늘의 처분(處分)일 것이니 다른 해 이날에 이 몸이 또 어디서 모일지 알지 못하겠고 그 모임이 꼭 있으리라고 도 할 수 없으며 비록 모여도 모두가 다 모일 수 없을 것이니 후세 사람이 오늘의 모임을 사모함이 오늘 우리들이 옛 사람의 모임을 사모함과 같을는지 어찌 알리오. 참으로 슬프다. 김 수사(秀士) 극명(克明)이 이일이 잊어질까 염려하여 훗날 기억에 남도록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내 어찌 글 할 줄 모른다 하여 거절하겠는가.’
금호선사선유도
대구문풍의 산실 금호강
대구가 문학의 꽃이 활짝 핀 것은 시기적으로는 16~17세기, 학맥으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2)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수 있다.
물론 이보다 이른 시기인 15세기에, 양관 대제학을 26년간 수행하면서 조선의 문형을 좌우했고, 과거시험관을 무려 23년간이나 역임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巨正, 1420~1488)선생이나, 동방 오 현의 한 분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선생 같은 걸출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사가정은 오랜 벼슬살이로 한훤당은 30대 후반 서울로 이거했기 때문에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는 미흡했다.
이러한 때에 좌도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우도에는 남명(南冥) 조식(曹植)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배출되면서 대구는 도산 학맥이 우세한 가운데 덕산의 후학도 공존하게 된다.
도산의 대표적인 인물은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과 추월헌(秋月軒) 채응룡(蔡應龍, 1530~1574)이었다. 대구 출신으로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등재된 분은 이 두 분뿐이다.
이를 두고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우리 대구지역의 유학은 계동선생으로 시작되어 발전하였다’라고 했다. 그러나 계동은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후학을 가르칠 시간이 없었고 또 오래 수를 못해서 그런지 모당 손처눌(1553~1634), 태암 이주(1556~1604)이외 특별한 제자를 두지 못했으며 반면에 출신은 대구가 아니었지만 역시 퇴계 후학이었던 한강은 만년에 대구에 머물었던 관계로 많은 제자를 두었다. 모당, 태암 역시 나중에 한강 학단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대구지역의 많은 선비들은 금호강변 경관이 수려한 곳에 후학을 가르치거나 자기만의 공간인 별서(別墅)나 정자를 마련하였으니 채응린(蔡應鱗, 1529~1584)이 검단에 압로정(鴨鷺亭)을, 전응창(계동의 형)이 무태에 세심정(洗心亭)을, 이주가 역시 무태에 환성정(喚醒亭)을 서사원이 다사 선사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정광천이 죽곡에 아금정(牙琴亭)을, 윤대승이 금호와 낙강이 합류하는 곳에 부강정(浮江亭)을 지었다.
그들은 이 공간에서 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다른 선비들과 교유하거나 후학을 가르쳤으며 연경서원을 강학하기도 했다. 그 단편적인 예를 살펴보면
0, 1603년(선조 36) 5월 10일
서사원이 선사재에서 배를 타고 세심정에 묵고, 이튿날은 도동의 곽재겸에 12일은 세심정에 도착하여 유숙하고 13일에 돌아감 이때 서사원, 곽재겸, 이주 전한(全閒) 등이 함께 했다.
0, 1606년(선조 39) 2월 26일
서사원이 선사재에서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과 함께 배를 타고 세심정에 와서 편안히 토의하고 술자리를 가짐
선사재는 다사에 세심정은 무태에 있어 양 정자를 금호강 뱃길을 통해 오고갔음을 알 수 있다. 계동선생의 연보를 통해 살펴본 짧은 기록이다.
또 모당 선생 연보에도 ‘정(한강을 말함)선생을 모시고 선사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이어서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모인 사람이 70명이었다.’ (1605년, 3월)라고 한 것을 볼 때, 금호강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강이 아니라, 지역 선비들의 강학처이자, 문학 작품의 무대, 접빈장소, 주요 교통로, 생활의 터전이었다. 한강 역시 낙재, 모당, 여헌 등과 이 일대를 수시로 주유(舟遊)했다.
따라서 금호강 특히 선사 일대는 지역 문인들의 소통·교유하며 학술과 문화 발전에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런 잦은 모임을 통해 내부 결속력을 높이고 대구 문풍을 활짝 꽃 피웠다.
외지의 선비들도 서호일대에 관한 시를 남겼는데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오봉 이호민(李好閔, 1553~1634), 송재 이우(李瑀, 1469~1517),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등으로 모두 당대 이름 난 문사들이다.
다사 십경도
서호병십곡
도석규의 아호는 서호(西湖) 또는 금남(錦南)이다.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 때 생모, 다음 날은 부친, 그 다음 날은 생가조모와 조모 상을 당하니 3일 만에 네 번 초상을 치르는 불행을 겪었다.
이런 가정형편 때문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 아우 면규(冕珪)와 함께 임란 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의 후손인 유심춘(柳尋春)에게 글을 배우니 학생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후 이락당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1809년(순조 9) 증광회시(增廣會試) 즉 나라에서 경사가 있을 때 보이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문장을 잘 지어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해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죽헌 도신징(1611~1678)의 문집을 간행했다. 죽헌은 2차 예송에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실각시킨 사람이다. 만년 가세가 급격히 나빠져서 거처를 오동(梧洞)으로 옮겼다. 1837년(헌종 3)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저서로 <가례편고(家禮便考)> ,서호애록(西湖哀錄)> <해동연원록(海東淵源錄)>등이 있다. 그가 지은 다사 십경 즉 ‘서호병10곡’은 다음과 같다.
제1곡 부강정(浮江亭)
부강정 터 (파란지붕)
첫째 구비, 부강정에 강물은 흐르는데 일곡부강강수류(一曲浮江江水流)
윤씨는 이미 가고 이씨가 성하도다. 윤옹기거이옹휴(尹翁己去李翁休)
유유한 인간사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유유인사성금고(悠悠人事成今古)
머리 돌려 백사장의 백구에게 물어볼거나! 회수평사문백구(回首平沙問白鷗)
*부강정 :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던 정자
-다사향토문화연구소장 최원관은 그 위치를 죽곡리 700-3번지로 비정하고 있다.
*윤옹기거이옹휴 : 부강정의 주인이 파평인 윤대승(尹大承)에서 임란 시 팔공산에서 창의(倡義) 서면대장(西面大將)으로 활동한 전의인 이종문의 아들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로 바뀐 것을 말하는 듯. 이지화는 스스로를 부강거서(浮江居士)라고 했다.
다포는 1613년(광해군 5)문과에 합격해 병조·예조참의를 지냈다. 그가 부강정을 인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조부(祖父) 이경두가 파평인 윤황(尹滉)의 딸과 혼인했는데 윤황은 부강정을 창건한 윤대승의 아버지였다.
제2곡 이락서당(伊洛書堂)
이락서당
둘째 구비 배가 이락정에 닿으니 이곡선임이락정(二曲船臨伊洛亭)
한강과 낙재를 기리는 단청이 아름답네. 모한미락화단청(慕寒彌樂畵丹靑)
강을 오르내리는 뱃노래 귓전에 울리니 도가황약문래이(棹歌怳若聞來耳)
구문의 뛰어난 선비 만고진리 깨달았도다. 구실군용만고성(九室群聳萬古醒)
*이락서당 : 1799년(정조 23)에 한강과 낙재를 기리기 위해 역내 9문중이 세운 서당
위치: 달서구 파산( 강창교 오른 쪽)
*구문 : 순천 박, 달성 서, 밀양 박, 광주(廣州) 이, 광주(光州) 이, 일직 손, 전의 이, 함안 조, 성주 도씨
제3곡 선사(仙槎)
셋째 구비 난가대에 의지하여 묻노니 3곡난가의문지(三曲爛柯椅問之)
고운의 선사 옛 자취를 아는 이 드물구나. 선사유사한능지(仙槎遺事罕能知)
가야산에서 천년동안 소식이 없도다. 가야천재무소식(伽倻千載無消息)
강 위에 뜬 가을 구름은 아득하기만 하네. 강상추운사한시(江上秋雲似漢時)
*선사 : 이현로를 따라 하빈으로 가는 삼거리와 이강서원 일대
-마천산 선사암(仙槎菴)에 최 고운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음 선사(仙槎) 즉 신선들이 타는 뗏목이라는 이름은 이 선사암으로부터 비롯된 것임
제4곡 이강서원(伊江書院)
넷째 구비 이강서원의 원우가 새롭고 사곡이강원우신(四曲伊江院宇新)
몇 그루 박달 향기 다시 봄을 맞았구나. 수주단향복위춘(數株檀香複爲春)
심의에 대대를 두르고 안빈낙도하였으니 심의대대단표락(深衣大帶簞瓢樂)
우리조상 당시에 진리를 얻었구나. 오조당년견득진(吾祖當年見得眞)
*이강서원 : 낙재 서사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
-선사암을 헐고 세웠다고 한다.
*단향(檀香) : 박달나무 향기가 아니라 향나무 향기로 추정 됨
제5곡 가지암(可止巖)
다섯 구비 배를 가지암에 대어보니 오곡정선가지암(五曲停船可止巖)
상서로운 짐승들이 노니는구나. 현원백록답삼삼(玄猿白鹿踏三三)
바윗돌은 잇대어 천길 절벽을 이루고 암암유석수천인(岩岩維石垂千仞)
한 줄기 장강의 물에 기강이 배여 있네. 일도장강기상함(一道長江氣像涵)
*가지암 : 서재마을 서쪽의 절벽 현재 세천공단조성으로 대부분의 원형이 파괴되었음
-한강의 동래 온천 행 출발지 지암(止巖)과 같은 곳으로 추정
제6곡 한 폭의 그림 같은 동산(東山)
동산
여섯 구비 동산은 한 폭의 그림 같은데 육곡동산사화도(六曲東山似畵圖)
팔군자가 나시어 용호서원에 봉향하고 팔군자출향용호(八君子出享龍湖)
제악 올려 향사 드린 지 오래인데 현가조두요요구(絃歌俎豆寥寥久)
아득한 풍연에 새들도 즐거워라. 호탕풍연조락오(浩湯風煙鳥樂娛)
*동산 : 용호서원 뒷산, 일명 돈산 즉 돼지(豚)산이라고 함
*팔군자 : 성주도씨 출신 8명의 선비
-양직당, 도성유, 서재, 도여유, 취애 도응유, 낙음 도경유, 지암, 도신수, 휘헌, 도신여, 죽헌 도신징, 석천 도이망.
제7곡 와룡산(臥龍山)
일곱 구비 와룡산을 돌아 나오니 칠지곡출와룡산(七之曲出臥龍山)
황제의 수레가 세 번이나 찾아 왔었구나. 재가삼운고차문(宰駕三云顧此問)
중도에 돌아가시니 제갈량은 통곡했고 중도붕년신량루(中道崩年臣亮淚)
한나라 천운은 거듭되지 않았네. 한가천조불중환(漢家天祚不重還)
*재가삼운고차문 : 유비와 와룡선생 제갈량의 고사를 말함
제8곡 은행정(銀杏亭)의 석양
여덟 구비 배가 닿으니 석양이 기울었는데 팔곡선정석일사(八曲船停夕日斜)
은행정이 들판 은행 있는 집에 연이었네. 은정감연야행가(銀亭堪漣野杏家)
소타고 강 건너던 신선 돌아오지 않는데 강상기우선불반(江上騎牛仙不返)
지금껏 사람들 누운 매화나무만 알 뿐이네 지금인독와매화(至今人讀臥梅花)
*은행정 : 마을 동편 금호강 변에 있던 은행나무 옆 정자
*기우선 : 한강과 낙재가 소를 타고 금호강을 건너 다녔다는 고사
제9곡 관어대(觀魚臺)
아홉 구비 강에 닿아 대에 이르지 않았으나 구곡임강부작대(九曲臨江不作臺)
낚싯대 드리운 봄 강물이 거울 같구나. 일호춘수감여개(一蒿春水鑑如開)
사물을 보고도 이치를 깨닫지 못하니 관어불달관어리(觀魚不達觀魚理)
선생 가신 후 찾아온 것이 한스럽구나. 최한선생거후래(最恨先生去後來)
* 관어대 :한강이 소요하던 정자,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십곡 사수의 물가(泗水濱)
열째 구비 사수가에 배를 대니 십곡유주사수빈(十曲維舟泗水濱)
크고 넓은 우리 유도가 만년토록 새롭구나. 왕양오도만년신(汪洋吾道萬年新)
상린이 활발하여 천기가 기를 정하니 상린활발천기정(翔鱗活潑天機定)
완연히 중앙에 지성인이 있도다. 완재중앙지성인(宛在中央知性人)
*왕양 : 강물이 넓게 흐르는 모양, 현재와 같이 제방을 쌓기 전 일대는 바다처럼 넓었을 것이다.
맺는 말
‘서호병10곡’은 다사지역 주민들이 만든 <다사향토지>나 <달성군지>에도 공개된 바 없는 귀중한 자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20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현장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와룡산’ ‘선사’ ‘사수빈’ ‘동산’ ‘이락서당’ ‘가지암’ 6곳은 그 나마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으나, ‘부강정’ ‘관어대’ ‘은행정’ 3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이강서원 1곳은 최근 복원되고 서원 앞까지 임도를 잘 닦아 놓았으나 가로수의 수종이 하필이면 임란(壬亂) 의병장을 지낸 낙재의 이미지와 달리 벚나무라 아쉽다.
일대는 <금호강종합개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차원에서 재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보(洑)의 설치나 준설 등을 통해 수량을 확보하고 수질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500여 년 전 16세기와 같이 배를 타고 다사에서 검단, 아니면 안심까지 출퇴근이 가능하도록 수운(水運)개발되었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깊게 배여 있는 곳인 만큼 ‘서호병십곡’의 일부와 비록 서호와는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17세기 지역 사람의 강학처이자 교유장소, 대구 문학의 산실이었던 무태의 세심정, 선사의 선사재, 강정의 부강정 3곳의 정자를 복원하고 해랑교 일대에는 전설의 주인공을 기리는 가칭 ‘해랑모녀상’을 건립하고 스토리텔링에 적합한 테마공원을 만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도록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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