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해탈문
입구의 울창한 송림
천왕문
종남산을 뒤로한 대웅전,1677년 숙종 3)중건하고 1932년 중수했다.
원진국사 비( 보물 제252호)각
원진국사 진영(가운데 있는 분)
조측 서산대사 우측 사명대사
경상북도 기념물(제11호)로 지정된 수령 400여 년의 탱자나무
탱자나무 믿둥치
4000명의 스님들이 밥을 담던 비사리구시
보경사의 유래
신라의 지명법사가 602(진평왕 24)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어떤 도인에게서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뿐아니라 이웃나라의 침략막고 삼국을 통일 할 것'이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여 그와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는데 오색 구름이 덮힌 산을 찾은 곳이 내연산이며 연못 속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으 메워 금당을 건립한 뒤에 보경사라고 했다고 한다.
경북 3경의 하나로 일컫는 빼어난 주위 경관을 지니고 있는데 계곡의 12폭포를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사찰 주위는 울창한 송림이 우겨져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중요문화재는 보물 제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인 보경사부도 등이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및 오층석탑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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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국사 승형(承逈)에 대하여
1172(명종 2)∼1221(고종 8). 고려 중기의 국사,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경상도 상주사람이다.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밑에서 자라났다.13세 때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1197년(명종 27) 스승 동순이 죽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하였으나, 명종이 그의 뛰어난 도행을 듣고, 특별히 초선(初選)을 치르게 하였다.그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로부터 법요(法要)를 받고 강릉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배한 뒤 크게 감응을 얻었다.또, 청평산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 首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 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이로써 모든 상(相)이 망상임을 통연히 깨닫고 자기 마음의 광대함을 알아 불법을 선양할 때에는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다고 발원하였다. 《능엄경》이 한국 선종에서 숭상되게 된 연유는 이자현이 문을 열고 승형이 다시 천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1210년(희종 6)에 연법사(演法寺)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치고, 1213년(강종 2)에 삼중대사(三重大師), 1214년(고종 1)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영일군 보경사(寶鏡寺)에 머물렀다.1220년에는 희종의 넷째아들인 경지(鏡智)의 은사가 되었고, 1221년에 《능엄경》을 설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다. 시호는 원진(圓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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