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야동쪽에서 바라본 함지산 사진 좌측이 자라봉 오른 쪽이 유람봉이다.
함지산의 유래
높이 288m로 대구 칠곡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다. 그리 높지 않으나 정상에 오르면 가깝게는 금호강이, 멀리는 대구와 칠곡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산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은 고장을 지키는 데도 유용해 4~5세기에 이미 성을 쌓았으니 이른바 팔거산성(八莒山城, 대구시 기념물 제6호)이다. 산록에는 5~6세기에 조성된 대구 최대규모이자 신라와 가야의 묘제(墓制)와도 다른 일명 구암동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석곽적석묘 379기의 고분(古墳, 사적 제544호)이 있어 대구 칠곡지역이 당시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큰 세력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고 숲이 울창해 삼림욕에 알맞은 산이다. 또한 환경부가 정한 멸종위기 2급 식물 솔붓꽃, 희귀식물 가침박달 대구에 드물게 자라는 분꽃나무, 귀룽나무 군락지도 있어 식생 또한 다양하다.
토박이 장년층들은 “반티산” 노곡동 사람들은 “관니산(冠尼山)”, 도남 출신으로 임란 때 창의한 전민련(全敏蓮, 1546~1615)은 “관인산(觀仁山)”, 동여도에서는 “독모산(獨母山)”,일제강점기의 측량기준점에는 “관야산(觀野山)”, 운암골의 미륵사(彌勒寺)에서는 “함지산(咸池山)”, 오늘날 지도에는 함지산(函芝山)으로 부른다. 이외 더 있을지 모르나 필자가 조사한 지금까지 밝혀진 이름이다.
첫째, 반티산은 산의 형상이 엿이나 묵 등을 담고 주로 머리에 이고 다니거나 운반하던 나무판자로 만든 뚜껑이 없는 도구 즉 반티(혹은 방티)를 엎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 하여 부쳐졌다.
둘째 관니산(冠尼山)은 마을 이름 노곡(魯谷)을 유학의 교조 공자(孔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빗대 지어진 것과 같이 성인 공자를 상징하는 뜻에서 공자의 자(字) 중니(仲尼)의 니(尼)자를 따와 산과 마을을 아울러 일대가 유학이 번성한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로 달성군 구지의 대니산을 들 수 있다. 원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었다. 우리나라 오현(五賢)의 한 분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젊은 날 이 산자락에서 공부하면서 공자를 숭모한다는 뜻에서 받들, 대(戴) 중, 니(尼) 즉 대니산(戴尼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과 닮았다.
셋째, 관인산(觀仁山)은 정구(鄭逑)선생의 14대손 뇌헌(磊軒) 정종호(鄭鐘鎬, 1875~1954)가 쓴 <정선전공우헌거옹양선생제단비(旌善全公愚軒莒翁兩先生祭壇碑)> 즉 정선전씨 우헌 전민련과 그의 아들 거옹 전사헌(全士憲, 1565~1618)의 제단비문 우헌 편에 나온다. “임진년 난리를 만나자 ‘꿈을 깨보니 가을바람 매섭고 야밤에 금호강이 시끄럽구나 / 눈을 들어 거대한 산천을 보고 해와 달을 향해 마음속에 맹세하노라.’라고 하면서 곡식 창고를 열고 가축을 풀어 군량을 충당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모아 ‘관인산(觀仁山)’에 진을 쳤다.
이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진지를 둘러보고 ‘천시도 좋고 지리도 좋고, 인화도 모두 (咸) 지극(지(至))하오. 마땅히 함지진(咸至陣)이라 고쳐야겠소. 내가 조달해야 할 군사를 줄여주시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해 주시오--”라고 했다는 비문에 나온다.
반티, 묵과 엿, 두부 등을 닮고 이고 다녔다. 엿을 담으면 엿반티, 묵을 담으면 묵반티라고 했다. 함지산은 반티를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반티산이라고 했다.
넷째, 독모산(獨母山)은 철종·고종 연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도(東與圖)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다소 생소한 이 이름이 등장한 배경은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칠곡지』 고적(古蹟), 팔거산성 조에 “칠곡부 남쪽 5리에 있는 퇴천방에 위치하고 있다. 흙을 쌓았는데 둘레가 2,423척이고, 샘이 두 개, 못이 하나 있었으나 무너져 황폐된 지 오래되었다. 세상에서는 독모성(獨母城)이라 일컫는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독모성에서 독모산이 된 것 같다.
다섯째, 관야산(觀野山), 볼 관(觀), 들 야(野)라는 자구(字句)로 보아 남쪽 원대지역의 고야들이나 동천, 학정, 구암동 쪽의 팔거들이 잘 바라보이는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출처가 불분명하다. 일제가 지적을 측량할 때 임의로 부친 이름 같다.
여섯째, 함지산(咸池山)은 미륵사 산문(山門)의 이름이다. 다, 함(咸) 못, 지(池)자로 표기했다. 현재 부르고 있는 함, 함(函) 지초, 지(芝)의 오류인지 아니면 자전(字典)에서 말하는 ’해가 멱을 감는 천상(天上)의 못. 또는 ‘천신(天神)’을 말하는 것인지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함(函), 결혼할 때 신랑 측에서 치마저고리 등 옷감과 혼서지(婚書紙)를 넣어 신부 측에 보내는 사각형의 용기, 반티와는 용도와 모양이 전혀 다르다.
하나의 산을 두고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명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형과 사는 사람들의 정서, 지리, 지형적인 특성을 담는 그릇임을 감안한다면 지역 정체성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다면 생김새를 잘 표현하고 오래 불려온 그러면서도 순수한 우리말 이름 반티산, 실학자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도에 등장하는 왕옥산, 공자를 기리는 관니산 등은 부르기 무난한 이름 같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도 무시할 수 없으니 현행지도와 여타 자른 자료에 많이 언급되어 이미 일반화된 함지산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으나 첫째는 함지산의 함(函)이 모양과 용도가 반티와 다르다는 점이다. 즉 함(函)은 결혼할 때 신랑 측에서 치마저고리 등 옷감과 혼서지(婚書紙)를 넣어 신부 측에 보내는 사각형의 용기인 데 비해 반티는 엿이나 두부, 묵 등 식재료를 담고 주로 머리에 이고 다니는 그릇 종류이다. 반티라는 한자가 없어 부득이 차용(借用)한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반티를 엎어 놓은 것 같아 반티산이라는 본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왜 지초, 지(芝)자 이냐 하는 점이다. 함과 같이 생긴 산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지(之)가 맞다. 다시 말해서 지초 지(芝) 자의 함지산이 아니라 어조사 ‘지(之)’자 “함의 산” 즉 “함지산(函之山)”이 맞다.
이번 조사를 통해 함지산의 남쪽 봉우리가 자라봉, 북쪽 봉우리는 유람봉이라는 사실을 달성서씨 재사 추모재(조야동) 중수기에 의해 새로 알게 되었다. 함지산(函之山)으로 수정함과 아울러 봉우리 이름도 새로 명명해야 한다.
'대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지산 망일봉이야기 (0) | 2011.06.18 |
---|---|
새로 발굴한 열암선생의 팔공산 팔경 (0) | 2011.06.08 |
세종 성대를 연 명재상 황희 선생을 기리는 상주 옥동서원 (0) | 2011.05.21 |
호국 사찰 내연산 보경사 (0) | 2011.05.10 |
봄이 무르익어가는 2, 28중앙청소년공원 (0) | 201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