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새로 발굴한 열암선생의 팔공산 팔경

이정웅 2011. 6. 8. 20:31

 

 대구 경북지방에서 최초로  1327년(고려 충숙왕 14)에 정려가 내려진 하광신의 효자각(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18호)

 효자각 현판

 조선 후기 성리학자 하시찬(1750~1828)을 기리는  경덕사

 열암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독무재(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17호)

 독무재 현판

 열암 유허비

 열암의 저술 팔례절요와 열암문집의 목판본이 보관 되어 있는 장서각

종손 하성대님으로부터 열암문집을 건네받은 필자

 

새로 발굴한 열암선생의 팔공산 팔경

 

수성구 만촌동 청기와 주유소 밑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건물 두 채가 있다. 화랑로를 축조할 때 성토를 하고, 주변에 건물을 지으며 축대를 경쟁적으로 높이 쌓아 지금은 푹 꺼져 있어 차에서 내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한 외진 곳이다.

그 중 한 채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을 기리는 독무재(獨茂齋,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7호)고, 다른 한 채는 효자 하광신(夏光臣)을 기리는 정려각( 같은 문화재자료 제 18호)이다.

본관지를 대구의 별호 달성(達城)으로 쓰고 있는 하문(夏門)은 고려 인종 대에 귀화해 대구에 정착한 토박이다.

시조 하흠(夏欽)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옮겨 살았고 그 아들 용(溶)이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입암리(봉덕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특히 하광신은 효성이 지극해 병중인 어머니에게 겨울에도 복숭아를 구해 주는 등 지극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1327년(충숙왕, 14) '이부시랑하광신지려(吏部侍郞夏光臣之閭)'라는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자손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이 효행은 효를 강조하는 성리학이 일반화 되지 아니하였던 고려시대라 조정에서는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대구 경북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효자각이다.

타국인인 이들은 대구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학문적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대표적인 분이 하시찬(1750~1828)이다.

만촌에서 출생한 그는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지금의 독무재가 있는 곳에서 약 500 서쪽에 있는 독무암에 옆에 집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고 생활하면서 독무암서(獨茂巖棲)라고 했다. 높은 학문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배우기를 청해 이곳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예학에 밝고 시문에 능해 <팔례절요(八禮節要)>와 <열암문집(悅菴文集)>를 남겼다. 열암의 시문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부분은 팔공산 팔경(八公山 八景)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팔공산을 사랑하여 단편적으로 시문을 남겼지만 여덟 곳을 함께 묶어 팔경(八景)을 노래 분을 열암 하시찬 선생이 유일할 것으로 여겨진다.

공산팔영(公山八詠)

 

제1영 소년대(少年臺)

공산기적석대류(公山奇蹟石臺留) 공산의 기이한 자취 석대가 남아

겁우남풍열기추(劫雨藍風閱幾秋) 비바람을 겪으면서 몇 년이나 지났던가

선자식송송기로(仙子植松松己老)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고

가명유속소년유(佳名惟屬少年遊) 아름다운 이름만 소년의 노님에 붙였네

 

제2영 방은교(訪隱橋)

백운심처석위교(白雲深處石爲橋) 흰 구름이 깊은 곳에 돌로 다리를 만드니

도차표연속처소(到此飄然俗사消) 여기에 이르면 가벼이 세속의 근심사라지네

도진청계인불견(渡津盡溪人不見) 맑은 시냇물 다 지나면 사람 보이지 않으니

송단하처농선숙(松壇何處弄仙숙) 송단 어느 곳에서 선선의 퉁소를 희롱할까

 

제3영 동화사(桐華寺)

사고천년탑불이(寺古千年塔不移) 절은 천년 되었으나 탑은 옮기지 않았네

벽오서노봉황지(碧梧棲老鳳凰枝) 푸른 오동나무에는 늙은 봉황이 깃들었네

조계일모소종기(漕溪日暮疎鐘起) 조계의 해가 저물어 드문 종소리가 들리니

몽리동첨축국사(夢裡同忝竺國師) 꿈속에 인도의 스승을 참배하네

 

제4영 염불암(念佛菴)

광석대전은소암(廣石臺前隱小菴) 광석대 앞에 작은 암자가 숨어 있으니

산혐속겸고수람(山嫌俗客故垂嵐) 산속 속객 싫어 일부러 놀을 드리웠네

거승입정천봉정(巨僧入定千峰靜) 승려들 참선에 들어가니 천봉이 고요하고

야영등명수불감(夜永燈明繡佛龕) 밤 깊고 등불 밝으니 마애불 수놓듯 비추니

 

제5영 일인석(一人石)

여조하년석상래(麗祖何年石上來) 고려 태조 언제 돌 위에 왔던가

저금전작일인대(柢今傳作一人臺) 다만 지금 일인대만 전해지네

완연여세무정의(頑然輿世無情意) 모질게도 세상과 정이 없어

열진흥망독불퇴(閱盡興亡獨不頹) 흥망성세 지켜보며 홀로 무너지지 않았네

 

제6영 삼성암(三省菴)

진장연운공렬선(盡幛連雲拱列仙) 그림 같은 휘장 구름에 닿아 신선 받드니

소암여괘절진연(小菴如掛絶塵緣) 작은 암자 걸린듯하니 세속 인연 끊어졌네

등임반일의선태(登臨半日疑蟬蛻) 반나절 높이 오르니 매미가 허물 벗은듯

안계관통만리천(眼界貫通萬里天) 시야는 만 리 하늘을 꿰뚫어 보네

 

제7영 선인대(仙人臺)

층층첩석형초진(層層疊石逈超塵) 층층으로 쌓인 돌은 멀리 세속을 벗어나

오노운대감작린(五老雲臺堪作隣) 오로봉과 운대를 이웃할만하네

하일진선경과거(何日眞仙經過去) 언제 참 신선이 지나갔는가

지금의혹세간인(至今疑惑世間人)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네

 

제8영 용문동(龍門洞)

고동심심수석기(古洞深深水石奇) 골짜기는 깊고 물과 돌은 기이하니

완간신우착산시(宛看神禹鑿山時) 우임금의 산 뚫는 기술 보는듯하네

군어점액전정활(群魚點額前程濶) 물고기들은 앞길이 넓어 머리가 부딪히고

간우화운처처수(澗雨和雲處處隨) 개울 비가 구름과 섞여 곳곳에서 따라 가네

 

 

이 시문이 중요한 점은 기존의 '팔공산 팔경'이 작자가 미상인데 불구하고 작품은 조선후기 대구 출신의 성리학자 하시찬선생이라는 점이다. 다음은 이미 알려진 이름 즉 제3경, 동화사, 제4경 염불암, 제5경 일인석, 제6경 삼성암 4곳 이외에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아니한 4곳 즉 제1경 소년대, 제2경 방은교, 제7경, 선인대, 제8경 용문동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곳이 과연 어디인지 밝혀내는 일이 남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