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침산이야기

이정웅 2011. 7. 3. 20:20

 

도청교에서 바라 본 침산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다.

 최근 새로 지은 침산정 기문이 없어 아쉽다.

 사가 서거정의 시비 '침산만조'

 침산정 현판

 만조의 무대가 되었을 3공단 사가 생전에는 호수 같이 넓은 곳이었을 것이다.

 공원 안내도

 침산만조 원문

 침산만조 해설 -----노산 이은상

 1997년 장년회에서 세운 유래비 박종양관련 부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일소대터에서 바라본 사가지 앞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박중양이 일소대라고 큰 돌에 새겨 놓았던 곳 지금 화단으로 변했다.

 침산에서 바라 본 함지산과 조야동

침산정으로 가는 숲길

 

침산이야기

 

 

높이가 해발 119. 5미터에 불과해 산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곳이기도 하지만 현장의 중요성 때문인지 일천 미터를 상회하는 팔공산, 비슬산과 함께 16세기의 고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버젓이 등재되어 있다.

침산1동 장년회가 세워 놓은 '침산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달구벌의 북쪽에 자리 잡은 대구문화의 발상지인 침산은 다른 말로 '수구(水溝)막이산'이라고도 했고 산의 모양이 소가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와우산(臥牛山), 또는 봉우리가 다섯 개라 하여 오봉산(五峰山)이라고도 부른다.

그 옛날 침산 앞에는 희고 고운 모래벌이 넓게 펴져 있어 흰 모래벌판, 즉 백사벌(白砂伐) 또는 '백사부리'라 하여 빨래하는 아낙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한다.

조선조 향토출신의 문신인 서거정(徐巨正)이 대구의 아름다운 열 곳을 골라 노래할 때 침산의 저녁노을을 두고 침산만조(砧山晩照)라 한 유서 깊은 곳이다.

1965년 2월 2일 공원(8,8052평)으로 지정된 후 1988년 5월 14일 공원조성기본계획이 결정되어 기반시설이 완료되었고 각종 간이체육시설과 편의시설, 자연학습장, 인공폭포, 이북5도민을 위한 망배단 등의 시설이 조성된 침산공원은 대구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 거듭나고 있는 선조들의 얼이 베인 공원이다.

잘 가꾸어 자손만대 값진 유산으로 물려주자

 

1997년 12월 침산1동 장년회 "

 

 

라고 했다.

 

그러나 침산1동사무소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백사부리에서 빨래하는 아낙네가 많다고 해서 빨래돌 침(砧), 혹은 다듬돌 침(砧)이라하며 일설에는 방아모양이니 방망이 모양이니 해서 침산이라고도 함

이외에도 여제단(厲祭檀 : 檀은 壇의 오기로 생각 됨)이 있었는데 액막이로 방아를 사용했는데 연유하였다고 함"

 

 

라고 했다.

친일파의 거두이자 대구읍성을 허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행사해 시민 공적(公賊)제1호로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박중양(1874~1955)이 산 밑에 거처를 정하고 그가 작대기를 짚고 자주 오르던 산이라 하여 '박작대기산'으로 불리었던 유래가 빠진 것이 아쉽지만 '장년회'의 유래 비는 비교적 소상하게 침산을 소개하고 있다.

반면에 침산1동 주민자치센터의 홈페이지는 부실하기 짝이 없으나 돌림병과 악귀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디딜방아 모양으로 만든 여제단을 설치해 방아산으로도 불렸다는 사실을 밝혀 그나마 다행이다.

침산 일대 구릉지는 선사시대 금호와 신천이 만들어 낸 기름진 충적토가 농사짓기에 알맞고 맑은 강은 어족(魚族)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웃한 연암산과 함께 달구벌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큰 취락이 장기적으로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일본의 사학자 아리미쓰(有光敎一)은 <대구부사>의 '석기시대의 대구'라는 글에서 대구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는 흑요석(黑曜石)을 깨어 만든 타제석기가 침산유적지에서 발견된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침산은 대구 십 경 중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제 10경 침산만조(砧山晩照)에 해당하는 곳이다.

 

 

물은 굽이돌고 산은 끝났는데

침산 푸른 숲에 가을 빛 어리었네

어디서 해 늦은 방아소리

손의 가슴 찧는고.

 

 

침산정이 새로 세워졌고 넓은 잔디밭에는 '침산만조'를 자연석에 새겨 놓아 풍경이 한결 풍성해졌다. 몇 년 전 아까시나무만 듬성듬성했던 헐벗었던 산이 짙게 푸르러졌고, 박중양이 읍성을 헌것이 통쾌해서 웃었다는 것인지 친일로 부와 권력을 누렸으나 인생이 일장춘몽이었다는 것을 후회하며 웃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던 그가 커다랗게 세워 놓았던 일소대(一笑臺)를 없애는 등 침산의 면모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다만 우뚝 솟은 침산정은 고속도로에서도 보여 대구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여름철은 주변의 무성한 나무 잎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고, 침산정에 앉아 시가지를 조망해도 큰 나무들로 가려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정자주변의 나무들은 관목으로 바꾸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