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고산서원과 고산팔경

이정웅 2011. 8. 5. 06:30

 

 

 

 

 고산서원

 퇴계 이황과 우복 정경세선생의 강학비

퇴계 우복선생나무

 

 

 강학비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애기석위 군락지

 고산서당 편액

 구도 현판

고산서원 정면

 

고모역을 지나 가천역에 이르면 그 때부터는 포도, 살구, 사과 등 과수원이 전개되며 그 사이로 난 길을 걷게 된다. 일대는 일명 '고산포도'로 불리는 포도의 명산지였다.

과수원 길 마지막 언덕 성산에 고산서원(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5호)이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 22번지에 있으며, 조선 명종 조에 지역의 유림들과 경산현령 윤희렴(尹希廉)이 재실(齋室)을 짓고 퇴계선생에게 재실의 이름을 청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로 한 퇴계의 수필(手筆)을 받았으며, 구도라는 편액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38)에 정변함, 정변호, 여응주, 진현 등이 중건했다. 1607년(선조 40) 우복 정경세가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있으면서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이때 도독(都督, 선조 때 교육을 장려`감독하기 위해 8도에 한 사람씩 둔 벼슬) 이성삼(李三省)도 참강(參講)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한강의 제자 서사선 강론하고 서당 운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1644년(인조 22)퇴계와 우복 양 선생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공론화 하고 1690년(숙종16) 진사 한홍익, 한두일 등이 대표로 선임되어 필요한 자금과 자재를 확보하여 1697년(숙종 23) 비로소 고산(孤山)이라는 원호(院號)를 내걸고 퇴계와 우복 두 선생을 배향(配享)1)하였고, 1734년(영조10)에 강당(講堂) 및 동서재(東西齋)를 완공하였으며, 1776년(영조52)에 원우(院宇)를 중수(重修)하였다.

1789년(정조13)에는 문루(門樓)를 세우고 연안인(延安人) 김재구(金載久)가 기문을 썼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훼철되었다. 1879년(고종16)에 이르러 향유(鄕儒)들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조직하여 서원의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원이라 편액하였고, 1964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산서당은 성동(城洞)의 서원(書院)골 성산 중턱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남천(南川)이 굽이 흐르고 넓은 고산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뒤편의 옛 사당 터에 퇴계와 우복선생의 강학유허비(講學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이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 지붕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3량가(樑架)로 막돌 덤벙 주초 위에 정면 가운데 1주(柱) 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으로 세운 간결한 민도리집 형식으로 되어있다. 비록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고산서당 8경

 

 

제1경 북악청람(北嶽靑嵐)

아침햇살과 함께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니 終朝嵐氣滴層宵

누구의 교묘한 솜씨로 비단을 펼쳤느냐 何事何人巧展綃

아름다운 숲이 둘레를 기리워 藾有林巒相對起

한 점 띠끌도 침노하지 못하리 纖埃飜向比中消

 

 

제2경 남계만하(南溪晩霞)

노을은 물결처럼 남촌을 감도니 彤霞凝水抱村南

백로는 못인줄 알고 펄펄 날아드는구나 孤鷺齋飛過野潭

바람불어 흩지마라 莫使林風吹散盡

고요가 깃든 곳 호흡이 좋아 靜中相對氣弘含

 

 

제3경 금호어박(琴湖漁舶)

고깃배 닻줄 풀어 기슭으로 내려가니 薄理魚舟向遠津

그윽한 갈대밭에 달빛도 새로워라 滿江蓼月日時新

내 노래 한 곡조로 我歌欲和夷溪櫂

무이구곡 화답하리 誰識竿頭進步人

 

 

제4경 우산목적(牛山牧笛)

냇가 비 그치고 풀은 우거진데 平川雨歇草如烟

소타고 돌아오는 목동의 길 牛背靑山路一邊

행여 누가 냇물에 귀 씻을 까봐 惑恐臨水人洗耳

소 몰아 석양에 내를 건넌다 倒騎驅入夕陽天

 

 

제5경 능소유어(菱沼遊魚)

천기로 뛰노는 물속의 고기는 牣躍天機水共長

세인이야 낚시를 오거나 말거나 忘筌不轎世閒忙

고기 아닌 나도 고기와 같이 莫言至樂魚非我

능담을 굽어보며 즐거워하노라 看到菱潭氣欲凉

 

 

제6경 유제신앵(柳堤新鶯)

봄빛은 따사롭고 버들은 푸르른 데 春光就暖柳消寒

금사를 희롱하는 꾀꼬리 세계는 拂地金絲暎水欄

봉황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敎得新聲韶鳳雜

숲속을 오락가락 흥에 겹노라 悠然乘興隔林看

 

 

제7경 창애노백(蒼崖老伯)

냇가의 정정한 늙은 측백나무 亭亭老伯俯淸溪

가지는 우거져 한 빛으로 푸르네 蒼翠交柯色正齋

모진 눈서리 견뎌 내거니 霜雪重封無奈爾

곧고 맑은 절개 자랑하노라 獨燐孤節强今題

 

 

제8경 평사몽구(平沙夢鷗)

한낮 모래밭에 졸고 있는 저 갈매기 鳴鷗向午人沙汀

아지랑이 몰고 강가의 풀은 십리에 푸르구나 江草和烟十里靑

옥같이 깨끗한 몸 티끌 하나 묻지 않고 玉潔其身塵不染

때로는 날아가고 때로는 쉬네 有時飛去有時停

 

 

운계 서석보(徐奭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1경 북악은 팔공산을, 제2경 남계는 남천을, 제3경 금호는 금호강을, 제4경 우산은 현재 우산을, 제5경 능소는 서원 동쪽 경지정리사업으로 메워진 곳에 있었던 소(沼)를, 제6경 유제는 금호강 제방의 버드나무숲을, 제7경 창애는 동쪽 절벽을, 제8경 평사는 금호강 백사장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의 대구 십 경과 달리 지역적으로 고산 일대로 한정된 것이 아쉽지만 지산동의 학산재를 중심으로 주변 십 경을 노래한 시문과 함께 수성지역 경승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고산서원은 지역사림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풍속을 교화시키고 문풍을 진작 시킨 점도 크지만 오늘날 고산(孤山)이라는 이름도 퇴계의 친필 고산서당 편액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때 의미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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