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장씨 시조이자 군위 입향조 장해빈이 심은 회화나무
북산서원 강당
증 병조참판공 장해빈의 위패를 모신 경화사
절강장씨 집성촌 경상북도 군위읍 대북리 전경
장해빈과 정부인 의령남씨 묘소
북산서원 현판
장해빈 신도비
명나라 지원군(支援軍)의 장수 장해빈과 군위 북산서원 회화나무
용의 해 임진(壬辰)년이 밝았다. 혹자는 용(龍)중에서도 흑룡의 해라고 하여 420년 전에 일어났던 왜란이 시사(示唆)하듯 변고가 잦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총선과 대선이 있어 이들 양대 선거가 국가장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가 그러했듯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 땐 준비가 부족하여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국방력이나 경제규모, 국민의 의식수준이 그 때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정규군보다 오히려 더 나라를 위해 싸웠듯이 우리 국민모두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해마다 신년벽두 각 언론사가 그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임진왜란 때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낫과 괭이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지켰던 호국의 현장을 되돌아보며 고혼을 위로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취재해 보겠다는 TV든 중앙지든 지방지든 언론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임진란 때 명나라 원군의 장수로로 와서 우리나라에 정착한 화헌(華軒) 장해빈(張海濱)과 그의 분신인 회화나무를 찾아보고자 한다.
공은 1575년(선조 7) 태의감 응화(應華)의 아들로 명나라 항주도 금화부 오강현(烏江縣)에서 태어났다. 1597년(선조 30)공의 나이 23세 때 정유재란 때 유격대장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죄익장(左翼將)으로 조선지원군으로 참전했다.
충주와 죽산에서 싸울 때 선두에 서서 많은 적의 목을 베고 승리하니 전승비가 세워졌으나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공은 아픈 몸을 돌보기는커녕 계속 출전하여 울산 증성(甑城)싸움에서도 많은 적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전쟁이 종료되고 같이 왔던 오(吳) 유격장 등이 귀국할 때 공은 전쟁에 다친 상처가 아물지 않아 몸이 아프고, 조국 명이 망할 것 같은데 비해 조선의 미풍양속이 마음이 들어 이곳 군위군 북산리 외진 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회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훗날 공의 장자 괴당(槐堂) 덕례(德禮)가 잘 보살펴 잎가 가지가 무성하여지면 명절이나 좋은 날을 골라 나무 밑에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고 한다.
공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혜민서(惠民署) 참봉과 다시 율봉도 찰방을 제수했으나 엄숙히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검소하게 살며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즐겼다.
의령 남씨를 맞아 5남 1녀를 두어 당대 내외손이 무려 100여명에 이르니 모두들 중화(中華)마을이라 했다. 공은 신장이 9척이고 말 타기를 좋아했으며, 천문지리, 관상 보는 법, 의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고을의 수령과 안동부사가 괴질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을 때 치료하니 명성이 원근에 알려지면서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으나 모두 고쳐주었다고 한다.
공은 고국 명나라를 잊지 못해 뒷산에 대명단을 쌓고 황제기일에는 서쪽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공도 역시 인간인지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을 수 없었던지 시 한편을 남겼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십년간풍이토(三十年間風異土)에 팔천리외월동휘(八千里外月同輝)라
화음이변명구폐(華音已變明裘弊)하니 수식양강구포의(誰識楊江舊布衣)오
삼십년간이나 이역 땅에서 세월만 보냈는데
팔 천리나 떨어진 저 달빛은 한결같이 다 같구나
고향나라 소식도 끊어지고 고향의 의복 풍속 다 변했으니
돌아간들 그 누가 나를 절강 사람으로 알아주리오.
1657년(효종 8)년 돌아가시니 향년 82세 당시로서는 장수하셨다. 사림의 공의에 의해 1684년(숙종 10)북산서원에 제향 되었고 1751년(영조 27)왕명으로 후손들의 부역이 면제되었다.
1892년(고종 29)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이 내려지고 같은 날 부인 의령남씨가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1,076가구 3,300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제3공화국시절 청와대 특보와 대구광역시의회 의장을 지낸 분이 있고, 대북마을에서만 면장 여섯 분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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