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창녕조씨 칠곡 입향조 석당 조세우가 심은 구지리 느티나무

이정웅 2012. 4. 9. 14:54

 

 

 창녕조씨 칠곡 입향조 조세우가 심은 느티나무

 

 

오른 쪽 어린나무는 후계목으로 심은 것 같다.

 수식 기념표석

 석당 조세우를 기리는 소술재

밑둥치가 썩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칠곡군 지정 보호수, 석당이 입향 후 심은 나무로 수령이 500여 년 임에도 불구하고 300년이라고 표기했다.

 

 

 기헌 조병선의 소술재 기문

 소술재 원경

소술재 현판

 

석당 조세우선생과 칠곡 동명의 구지리 느티나무

 

 

 

15세기 팔거현에는 도(都), 현(玄), 임(任), 전(田), 변(卞), 배(裴), 임(林)씨 등 모두 7개 성씨가 주류사회(主流社會)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지의 기록을 볼 때 비록 창녕 조씨들이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팔거지역 향촌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들에 비해 좀 늦게 자리를 잡았던 던 것 같다.

 

 

 

팔거입향은 성주목사 조세우(曺世虞, 1483~?)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은 아호가 석당(石塘)으로 창녕 고암에서 부사를 지낸 아버지 상겸(尙謙)과 어머니 문화 류씨 사이에 사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개(氣槪)가 높고 도량이 넓었으며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여 주위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1513년(중종 8)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 때 정흠, 이언적, 태두남, 송희규 등이 함께 합격하고 이어 대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생균관 생원이었던 시절 김안로의 권세에 눌려 아무도 시비를 못할 때 간신 김안로(金安老)일당의 탄핵에 앞장서서 연속 네 차례나 상소 올렸다. 1537년(중종 32) 10월 29일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세우(曹世虞) 등이 상소하기를, “신하로서 저지를 수 없는 흉악한 죄를 지은 세 사람은 간사(奸邪)의 율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 모의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난적(亂賊)의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올바른 형벌을 밝게 보여서 처자(妻子)까지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김안로는 단지 사사에 그쳐 이미 왕자가 역적을 주륙하는 뜻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허항과 채무택은 죄가 김안로와 같은데도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하여 전하께서 부도한 죄인을 용서하시어 구차하게 왕법을 이처럼 굽히신단 말입니까? 임금이 법을 쓰는 데는 반드시 인심에 따르셔야 하는데 일국의 신민이 모두 죽여야 옳다고 하는데도 유독 전하께서만 미안하게 여기시니 신들은 못내 의혹됩니다. 죄가 혹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법을 써도 됩니다. 그러나 난적을 죽여서 여러 사람의 분함을 푸는데, 무슨 미안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무리들이 용사하던 날에 무고한 사람을 얽어 넣어 눈 한번 흘긴 사람들까지 삼경(三逕, 간신 김안로·허항·채무택 등이 조작해낸 말) 이라고 지목하여 일망타진하였는데 그 때에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편안히 여기셨는데, 지금 유독 난적을 죽이기 미안하다고 핑계하고 결단하시지 않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삼흉(三兇)의 죄는 모두가 난적에 해당하는데, 공론이 일어난 때가 달랐기 때문에 이흉(二兇)이 경각에 달린 목숨을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들은 격분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성단(聖斷)을 특별히 분발하시어 이미 죽은 김안로의 머리를 베시고, 허항과 채무택의 머리를 거두어 장대에 매달아서 큰 거리에 세우시고, 그 족속을 멸하시어 왕법을 바루소서.”하니, 답하였다.

“상소의 뜻이 지당하다. 그러나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다. 김안로는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으니, 사사한 것도 중법을 쓴 것이다. 채무택 등도 이제 역시 사사하였으니, 더 형을 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조정의 뜻이 그러한데 어찌 고치겠는가.”라고 했다.

 

 

공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상소문이다.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는 ‘얻어서도 자만하지 않았고, 잃어서도 슬퍼하지 않았다. 엄자릉의 의지와 취향을 이었고, 주렴계의 기상을 볼 수 있으나 재주와 학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 세상과 더불어 등지고 살아도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회재(晦齋)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후에 성주목사를 지내고 1540년 경 창녕에서 팔거(현 칠곡군 동명면 구지리)에 이거해 창녕 조문의 칠곡입향조가 되었다.

공은 터를 잡은 곳에 한그루 느티나무를 심었으니 칠곡군보호수로 지금도 잎을 피우고 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세력이 너무 약해 대부분이 썩고 외줄기만 살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느티나무의 가지처럼 후손이 번창하여 증손 계안(繼顔)이 문과에 급제, 공조참의에 이르고, 석현(錫玄)이 동몽교관, 백승(栢承)이 여러 군의 수령을 거쳐 공조참의, 화승(華承)이 북부도사(北部都事)에 이르렀고, 윤문(胤文)은 문장과 덕행이 높았으며, 후학을 위해 도산재를 창건하고, 정이(鼎彝)는 경서와 사서에 밝았고 극승(克承)은 연암재를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이상은 교남지에 따른 것이다.

유고집으로 <석당공유적실기>가 있다. 기업인, 법조인, 교수, 도의원, 면장, 조합장 공무원 등 많은 인재들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