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시대 이홍이 중국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측백나무 전경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아도 끝이 다 보이지 않는 연못
소우당 사랑채
소우당 별당
금성산의 음기를 누리기 위해 일부러 쌓은 남근석
소우당 안채
소우당 정자
측백나무 줄기
친환경적인 화장실
소우당 안채 후원
의성 산운마을 소우당 별당의 측백나무
의성군 금성산 남쪽 나지막한 구릉지에 영천이씨 집성촌 산운마을이 있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개척한 곳이다.
학동은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강릉 부사가 되었다. 부임 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왜적의 목을 베고 또는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당상관, 정3품)으로 올려 주었다. 1603년(선조 36)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더는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였다. 저서로 『학동일고』가 있다.
두 아들 또한 훌륭했으니 형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은 1597년(선조 30)에, 아우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은 1600년(선조 33) 문과에 급제했다. 경정은 승문원 정자를 거처 1602년(선조 35)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9년 (광해군 1) 옥당(玉堂, 홍문관)에 뽑혔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귀향하여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교리·세자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했다.
1617년(광해군 9) 인목왕후를 폐비시키려고 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이이첨(李爾瞻)의 모함을 받아 벼슬을 잃고 고향에 내려와 10여 년을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했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장령에 복직했다.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잘 이해시킨 공로로 당상관에 오르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 (인조 5) 정묘호란 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서 세자를 지켰다.
1629년(인조 7)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그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했으며, 의리에 강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들이 조선의 이태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가 1천여 수에 이르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 되고 저서로 『경정집』 『조천록 朝天錄』등이 있다.
아우 자암은 1603년(선조 36) 평안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 호소사 장현광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난이 끝난 뒤 동래부사로 나가 선정을 펼치고 그 뒤 호조참의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1645년(인조 23) 경주부윤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저서로 『건주견문록』 『자암집』이 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산운마을은 이들 삼부자가 기반을 굳혔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학동의 7대손 운곡 이희발(李羲發, 1768∼1849)이 명문의 지위를 계승했다. 운곡(雲谷)은 1795년(정조 19) 문과에 급제한 뒤 초계문신(抄啓文臣, 정조가 인재양성을 위해 선발한 신하)으로 발탁되었으며, 그 뒤 순조 때 대사간, 헌종 초기에 승지가 되었다.
1847년(헌종 13) 병조참판으로 있을 때 국방 정책을 잘 펼쳐 1849년(헌종 15) 형조판서로 승진, 한 나라의 군정을 바로잡는 중책을 맡았으나 병으로 곧 물러났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현존하는 40여 채 고택 중 소우당(素宇堂, 중요민속자료 제237호)은 정원이 아름답다. 소우(素宇) 이가발(李家發)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채는 1880년대 죽파(竹坡) 이장섭(李章燮, 1854~1907)이 고쳐 지었다. 그는 1888년(고종 25)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수찬을 지냈다.
간결하고 소박한 형태로 지어진 영남지방 사대부의 상류 주택으로, 담장 안에 조성한 정원과 별당은 당시 풍류와 운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특히, 연못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조선 시대 전통 조경기법인 네모 나게 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둥근 인공섬을 두는 천원지방(天圓地方,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사상을 도입한 것과 달리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주 안압지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소나무 등 수십 종의 정원수 중에서 측백나무가 눈에 띈다. 후손 이대권의 증언에 의하면 죽파가 중국의 명나라 황제 묘역에서 2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굳이 명나라 황제 묘역의 측백나무를 선택한 까닭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많은 선비가 가졌던 숭명(崇明)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당·송이나 청(淸)도 아니고 굳이 명나라 황제의 혼이 깃든 이 측백나무를 통해 스스로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존경하는 선비라는 뜻의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자임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귀한 나무였던 만큼 일화도 많았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씨를 백자인(柏子仁)이라 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나무다. 그런데도 “껍질이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 “아이 못 낳는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원근의 아낙네들이 깊은 밤에 몰래 담을 넘고 들어와 가지를 꺾어 갔다고 했다. 일설에는 죽파의 아들 이홍(李鴻, 1887~1972)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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