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헌 박성수가 심은 탱자나무
삼가헌, 중문채를 초가로 그대로 두어 선비의 청빈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대구에서 유일한 전통기법의 정자 하엽정
삼가헌 현판
박팽년을 기리는 낙빈서원
삼가헌 기문
삼충각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육신사 성인문
태고정
순천인 삼가헌 박성수와 달성 파회마을 탱자나무
달성군 하빈면 묘골은 사육신의 한 분으로 유일하게 혈손을 보전한 취금헌 박팽년(1417~1456)선생의 후손들이 사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선생은 충남 회덕에서 태어나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아버지 박중림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순(珣)·분(奮) 등 삼대가 참화를 입은 분이다.
1691년(숙종 17) 관작이 회복되고,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영월 장릉(莊陵, 단종의 능)의 충신단(忠臣壇), 대구의 낙빈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취금헌이 후손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아들 박순의 부인 성주이씨 로부터 비롯되었다. 친정이 묘골인 이씨는 친정 가까운 대구로 자원해 관비(官婢)로 와 있었다. 이 때 이미 임신 중이었고 때 마침 해산을 하니 아들을 낳았다. 공교롭게도 친정집의 여종 역시 딸을 낳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역적의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몰수당해야 했다.
이 때 두 사람은 아이를 바꾸어 길렀다. 그러나 역적의 손자인 만큼 드러내놓고 키울 수는 없었다. 이름도 짓지 못하고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종이라 하여 박비로만 불렀다. 그 후 비가 청년이 되었을 때 이모부인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관찰사(재임기간 1493~1494)로 왔다. 그는 묘골을 찾아와 박비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수 있느냐 자수하여 떳떳하게 살자’ 고 했다. 성종(成宗)은 그를 용서하고 충신의 자손이라며 오히려 칭찬하면서 이름 일산(壹珊)을 하사하고, 사복시(司僕侍)의 책임자 벼슬을 내렸다.
이후 대구에 터를 잡은 순천박문은 충신의 후예답게 임란 시 선무원종공신 3명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태고정, 도곡재, 삼충각을 비롯한 뜻 깊은 문화재를 남겼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묘골을 둘러보고 파회에 있는 삼가헌(三可軒, 중요민속자료 제104호)찾았다. 취금헌의 11대 손 성수(聖洙, 1735~1810)가 1769년(영조 45)에 지은 별채가 있는 곳이자, 대구에서는 유일하게 전통기법으로 지은 연지(蓮池)가 있는 곳이며 인기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공은 풍모가 수려하고, 용기가 탁월하며, 학문이 높고, 특히 경세에 해박하고 장서를 많이 보유했다고 한다. 저서로 <고금인감(古今人鑑)>이 있으며 벼슬은 첨중추(僉中樞)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공은 묘골 본가에서 이곳 파회(坡回)를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시도 짓고 담소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둘째 아들 광석(光錫, 1764~1845)이 호조참의, 한성부 우윤 등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자 이 집터와 당신의 호인 삼가헌을 당호로 물려주었다. 그 뒤 광석은 1826년(순조 26) 초가를 헐고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초가로 이어 궁궐에도 초가를 한 채 두는 이유와 같다고 했다.
삼가헌은 중용에서 따온 말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라고 한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광석의 손자 하정(荷亭) 규현(奎鉉)이 집을 지으며 흙을 파낸 자리를 못으로 꾸미고 파산서당 건물을 앞으로 옮겨 지으며 누마루를 한 칸 달아냈고 못에는 연을 심고 가꾸었었다. 하엽정이란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
규모는 작지만 못을 네모지게 하고, 가운데 둥근 인공 섬을 조성하여 방지원도(方池圓島)의 전형적인 우리나라 연못형식을 취했다.
많은 선비들이 연꽃을 좋아하는 것은 진흙 속에 살아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는데 겉은 꼿꼿하고, 가지를 치지 않으며, 멀리 갈수록 꽃향기가 더 맑기 때문에 꽃 중에 군자(君子)라고 했던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의 영향이 크다. 규현이 정자 이름을 여느 선비들처럼 군자정이나 연정(蓮亭)이라 하지 아니하고 굳이 하엽정(荷葉亭)이라고 고집한 것은 꽃보다 잎을 더 사랑하고자 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어떤 시인은 깊은 밤 연잎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하도 정겨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못가로 나간다고 했다. 공은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마음으로 시정(詩情)을 느끼고자 했던 것 같다.
삼가헌은 별채를 마무리하고 매화나무, 굴참나무, 탱자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매화는 죽고 탱자나무와 굴참나무만 240여년이란 오랜 세월을 버티며 아름다운 이곳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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