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향조 이필의 사적비
대구 입향조 이필을 기리는 재실 하빈면 기곡리
낙포 이종문이 지은 하목정 전경
하목정
인조가 준 내탕금으로 고쳐 지은 처마의 부연(덧서까래)
인조가 써 준 현판
조선 후기 명재상 채제공의 시판
전양군 사당
뒷 편에서 본 하목정
하목정 안채
전양군 사당의 배롱나무
전의 이씨와 대구 달성의 하목정
전의 이씨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全義面, 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 본향인 사람들이다. 그곳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낯선 대구에서도 뿌리를 굳건히 내려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충의로 학문으로 대구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낙동강 안(岸)에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霞鶩亭)을 남겼고 금호강가에 부강정을 경영하여 대구사림이 강안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처음 대구 땅에 자리 잡은 사람은 이필(李佖)이었다. 경기도 부평(현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서 태어나 문음으로 예산현감을 지내고 명종조 달성군 하빈 하산리로 이거하였다.
토박이 사족들이 여론을 주도하던 대구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분은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었다. 공은 임란 시 망우당 휘하에서 화왕산성을 지킨 아버지 경두(慶斗)와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1566년(명종 21)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임란 시 서사원, 손처눌, 이주 등과 팔공산에서 창의하여 하빈 서면대장으로 활동하여 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 금화사 별좌를 시작으로 제용감 직장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외직으로 1610년(광해군 2) 삼가현감, 1612년(광해군 4) 비안현감, 1620(광해군 12)양성현감, 이듬해 군위현감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1638년(인조 16) 돌아가시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낙포집>이 있다.
맏이 이지영과 둘째 이지화 모두 대과에 급제해 가문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늘 날 이들 후손들은 하빈면 하산리, 동곡리, 기곡리,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다사면 부곡리 등 낙동강 좌, 우안에 벌족으로 세거하고 있다.
낙포 이종문과 하목정
1604년(선조 37)에 공이 지은 하목정(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은 대구에서는 드물게 매우 아름다운 정자다.
특히,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던 곳으로 왕이 머문 곳으로 대구에서는 유일무이한 곳이다.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지영이 출사하여 인조를 접견했을 때 하목정에 머문 이야기를 하면서 덧서까래 즉 부연(附椽)을 달지 않는 까닭을 물어 개인의 정자나 집에 부연을 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자 부연을 달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요되는 경비를 왕실의 내탕금에서 200냥을 지원해 주고 하목정이라는 현판도 직접 써 주었다. 현재 하목정에 걸려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도난이나 화재 등을 대비해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 구조이다. 내부에는 이덕형, 채제공, 김명석, 남용익 등 이름 난 문사들이 쓴 많은 시문이 걸려있다.
대경대학 조영화, 부산대학 이호열 교수는 ‘조선 중후기 반가(班家)의 객청(客廳)으로 건축기법과 공간구성 및 장식 등에 큰 특징이 있는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수월당 이지영(李之英)
1585년(선조 18)∼1639년(인조 17) 조선 중기 문신으로 호는 수월당(水月堂)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부친 이종문(李宗文)과 모친 전경창(全慶昌)의 딸 경산 전씨(慶山 全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가 계동인 전경창은 대구에서 단 두 명뿐인 퇴계문인의 한 사람이다. 부인은 김치삼(金致三)의 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13년(광해군 5) 증광시 병과에 합격하였고, 그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용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학록학정(學錄學正), 1616년(광해군 8) 함경북도평사(咸鏡北道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 9)부터 1619년(광해군 11)까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직강(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그해 호조좌랑(戶曹佐郞)‧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 말기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북청판관(北靑判官)에 제수되자 나아가 잘 다스렸다는 평가가 있어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1627년(인조 5) 해직을 청하고서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1630년(인조 8) 호조좌랑(戶曹佐郞)에 다시 임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나, 1623년(인조 1) 울진현령(蔚珍縣令)에 제수되었다. 향년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고로 《수월당집(水月堂集)》이 있는데, 집안사람들의 유고와 함께 《전성세고(全城世稿)》에 실려 전한다.
부강거사 이지화(李之華)
1588년(선조 21)∼1666년(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동계(東溪). 이경두(李慶斗)의 손자로, 현감 이종문(李宗文)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경창(全慶昌)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 서사원, 손처눌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검열‧대교를 역임하고 1621년에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김해‧창원‧파주의 목사를 지냈다.
그 뒤 병조참의‧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의 막하에서 군량의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 5) 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고령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다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강정마을에는 할아버지의 처남 윤대승이 창건한 부강정이 있었다. 이곳은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곳으로 신라시대 왕들이 유람할 만큼 경승이 빼어난 곳이다. 특히 한강 정구가 칠곡 사수에 머물면서 후학들과 뱃놀이할 때 자주 이용했던 곳이고, 이우, 권문해 등 당대 명사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던 곳이다. 그러나 임란 등으로 허물어져 방치되고 있자 1636년(인조 14)경 이를 인수하여 다시 옛 명성을 찾으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공은 부강처사임을 자임하며 상량문, 기문 등을 당대 조선 문단의 거물이었던 이식(李植)과 이민구(李敏求)에게 부탁한데서 공의 부강정 복원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전양군 이익필
1674년(현종 15)∼1751년(영조 2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하옹(霞翁)으로 1703년(숙종 29) 무과로 등과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토벌 시 양 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특히, 죽산전투(竹山戰鬪)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앞서 소개한 이지영, 이지화 이외에도 길주목사 구(球), 하동현감 현(玹), 자인현감 여주(汝柱) , 사헌부 지평 관후(觀厚), 등 문과 급제자 8명, 전양군 외 무과급제자 13명, 낙포를 비롯해 생원, 진사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여 지역의 향반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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