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옥산 멀리 압로정이 보인다.
압로정
정면에서 본 압로정
측면에서본 압로정
압로정 현판
송담 유허비
압로정 앞 금호강
압로정 회화너무
왕옥산과 압로정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불로, 지저, 입석동일대는 넓은 평야지대(K-2가 들어서기 전)인데 반하여 서쪽의 검단동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비록 야트막하지만 3~4세기에 쌓은 둘레 1Km쩡도의 토성이 있다. 동쪽은 금호강변의 가파른 하식애가 절벽을 이루고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금호강을 해자(垓子)로 활용하여, 성벽을 따로 만들지 아니하고 남쪽에만 흙으로 성을 쌓았다. 또 이 산 동쪽에 금호강을 대표하는 정자 압로정이 있다.
1608년 3월 (선조 48) 대구 부사 정경세(鄭經世)가 기우제를 지냈으나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자 목민관으로서의 책임을 느끼며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제목은 “높은 산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으나 응함이 없어 채길중의 띠로 이은 정자에서 적다’ 이다. (禱雨寅山無應, 題蔡吉仲茅亭) 시문은 다음과 같다
성을 나올때에 조금비가 내리더니 /산상에 오르니 날이개었네 / 농부들이 이행차를 꾸짖을까 부끄럽구나 / 구름은 본래 무심하여 떠나 가는데 /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니 / 새들도 뜻이 있는 듯 조심스럽게 날아가네 / 이 산이 에로부터 영험이 많다고 들었는데 / 이에 나의 작은 혈성(血誠)을 다하네 / 두 해 동안 비웃을 견디며 태수로 지냈는데 / 귀밑의 흰터럭이 천개나 더하였네.
18세기 간행된 <대구읍지> 누정 조에는 압로정(鴨鷺亭)은 “부(대구부)의 북쪽 금호강가에 있다. 지난날 참판 이영(李榮, 1494~1563)이 지었다.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은 그의 외손인데, 그곳에 생도를 모아 의리를 강론하였다. 지금은 건물이 없어졌다.“”라고 했다.
그 후 19세기에 지은 <대구읍지>에는 “ 지금 중수하였다.”는 기사가 보여 한 때 멸실되었다가 복원된 것 같다.
이런 기록을 살펴볼 때 이산은 삼국시대에 이미 토성을 쌓았던 유서 깊은 곳이자 수령이 기우제를 지냈던 신령한 산이며, 당시 대구 출신으로서는 상당한 고위직에 있던 괘편당(掛鞭堂, 이영의 아호)이 건조한 명소 압로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시의 행정지도에 산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러다보니 이곳의 성 이름도 마을이름 검단의 “검단토성‘이다. 용두산의 “용두산토성”, 고산의 “고산토성”이라하고 하면 각기 용두산이나 고산에 있는 성(城)인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제(日帝)가 처음 지도를 만들면서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고 고의로 누락했든 아니면 실수로 등재하지 아니하였든 지도에 올려 대구시의 정책자료로 활용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그런데 대구향교 장의(掌議) 구본욱님이 “팔공산과 금호강을 왕래하며 강학한 송담 채응린(1529~1584)”을 <유림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읽고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었다.
구(具) 장의는 “왕옥산(王屋山)”이라고 했다.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黃帝)가 찾아가서 도(道)를 물었다고 하는 신선들이 사는 산을 일컫는데 송담 채응린이 따왔다고 한다.
송담(松潭, 채응린의 아호)이 외조부 이영의 압로정을 물려받은 것은 1561년(명종 16) 33살 되던 해로 보인다. 그 후 소유정(所有亭)을 지었다. 압로정은 오리(鴨)와 해오라기 (鷺)이나 “물새와 친하다”는 뜻이고, 소유정은 세상의 33개 이상향 중에서 첫번째 앙옥산에 있는 작고 청허한 마을 “소유청허지천(小有淸虛之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시 왜군의 만행으로 소실되어 복원했으나 그 후 인근 마을 불량배들의 부주의로 다시 불타고 현존하는 압로정은 1796년(정조 20) 8세 손 채필훈(1759~1838)이 복원했다고 한다. 구(具) 장의는 송담을 전경창, 정사철과 더불어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성리학을 가르친 유학자라고 했다.
송담은 본관이 인천으로 1529년(중종 24) 참봉 채홍(蔡泓)과 어머니 영천이씨 사이에 후동(後洞, 경상감영공원 북동편)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이영(李榮)은 병조참판(종2품 현, 국방부 차관)을 지낸 대구지역에서는 당시 최고위 공직자일 뿐 아니라, 퇴계 이황과 같은 해 청백리로 뽑힌 분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인격완성을 목표로 공부하였다고 한다. 대구지역에서는 단 한사람 퇴계(退溪) 문인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을사사화를 보고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수신에 힘썼다.
경학과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강호의 즐거움에 심취되어 금호강변의 왕옥산(王屋山) 기슭에 소유정(小有亭)과 압로정(鴨鷺亭)에서 명유들과 시를 읊으며 속세를 벗어난 삶을 누렸다.
1584년(선조 17)에 56세로 돌아가니 사림에서 그의 덕행을 숭모하여 유호서원(柳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송담실기>가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스승과 친구처럼 지냈으며 학행과 문장으로 추앙받았다. 선지, 선행, 선정, 선길, 선견, 선근, 선용 아들 7형제와 딸 둘 모두 7남 2녀를 두었다.
압로정은 한강 정구가 45일간 봉산욕행 즉 동래온천을 다녀오면서 마지막 머문곳이기도 했지만 당시 지방 수령으로 최 고위직이었던 윤훤 등 11명의 관찰사와 권문해 등 12명의 대구부사 그 외 곽재겸, 손처눌 등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와 학문을 즐기던 곳이다. 특히, 대구 사림의 영수 서사원을 처음 학문에 눈뜨게 한 곳이다.
고산 윤선도, 송강 정철과 더불어 가사문학의 3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영천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가 “소유정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16~17세기 금호강에는 강정의 부강정, 죽곡의 아금정, 사수의 관어대, 무태의 세심정과 검단의 압로정이 있어 선비들이 뱃길을 왕래하며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던 강안문학(江岸文學)의 요람이었다.
그 중심에 압로정이 있었다. 다른 정자들은 다 사라졌으나 압로정 만은 후손들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오늘날까지 보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적한 곳이 되었다.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남긴 시문(詩文)을 국역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전할 필요가 있다.
왕옥산은 그리 높지 않고 대구시가지 한 쪽 외진 곳에 있지만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서 깊은 곳이자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강학장소 압로정과 소유정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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