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죽령의 유래

이정웅 2013. 1. 24. 08:35

 

 

 영남과 호서지역의 통로이자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오늘날의 죽령

 죽령 옛길

 죽령옛길 안내판

죽령안내표지석

 

 

 

단양군 소재 죽령산산당

죽령의 유래

 

0, 죽죽의 순사설화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서기158) 3월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 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 ---영주시

 

0, 대나무 지팡이 설화

어느 도승(道僧)이 이 고개를 넘어 가다가 너무 힘들어 짚고 가던 대나무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살아나서 대나무 고개 즉 ‘대령’을 한자로 대죽(竹)자와, 고개 령(嶺)을 써서 ‘죽령(竹嶺)’이라고 한다.--- 이장우(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브리티니커 백과사전

 

 

*검토의견

신라 아달라왕 5년(158) 죽죽(竹竹)에 의해 죽령이 열린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죽죽이 길을 내다가 지쳐서 ‘순사’한 것과 그를 제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죽죽사’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조선 중기 월천 조목(趙穆, 1524~1606)의 ‘장림에 숲이 자라지 않고 죽령도 대나무가 없는 고개인데 대저 실제로 없는 것들을 인간이 어찌하여 장림과 죽령이라 하였던고.(長林不長林, 竹嶺無竹嶺, 大抵實不存, 人間幾林嶺)’ 라는 시에 죽령에 대나무가 없다고 하였다.

죽죽사(竹竹祠) 또한 신라는 물론 조선 초기 조정에서 단양군수로 하여금 죽령산신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게 했는데 그 때 지은 죽령산신각(竹嶺山神閣, 현 죽령산신당, 충북 민속자료 제3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