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벼슬이 끝나자 과감하게 고향에 내려와 고향 집을 지키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책(書冊)을 보존하고 가학(家學)을 공부하면서,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인생 상담을 해주며 말년을 보내는 삶. 대구 화원의 중곡(中谷) 문태갑(文胎甲·83) 선생이 이렇게 산다.
남평 문씨 세거지인 대구 화원의 인흥마을에는 방문객들의 모임 공간인 수백당(守白堂)과 고서 2만권을 수장한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다. 인수문고는 중곡의 조부인 수봉 문영박이 100여년 전에 거금을 들여 조성한 만권당이다. 영남학파는 물론이고 기호학파의 문집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점이 특이하다. 그뿐만 아니라 강화학파(江華學派)였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을 통하여 중국 개화기의 책도 수집해놓고 있다. 고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공간이 광거당인데, '광거당(廣居堂)'이라는 현판 글씨는 상해 근처의 남통(南通)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시 중국 지식층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장건(張�f)의 글씨라고 한다. '수백당'도 청나라 말기의 대학자였던 정효서(鄭孝胥)의 글씨이다. 1900년대 초 중국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창강을 매개로 이 집안과 선이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한두 달 동안은 공짜로 먹고 자면서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이었던 인흥의 광거당에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독서가가 하루 평균 10여명 여기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인수문고가 19세기의 한문 서적들이라면 그 손자인 중곡이 서울에서 공직 생활 틈틈이 모은 장서 5000여권은 20세기 한국학에 관한 책이다. 이것이 중곡문고(中谷文庫)이다. 그 가운데 우리 역사에 대한 책이 1000여권이나 된다. 80대의 중곡 선생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평균 손님 4~5명에게 직접 차를 대접한다. 지난 18년 동안 책을 보기 위하여 찾아온 전국 각지의 방문객들에게 타 준 커피만 해도 대략 2만여 잔 정도 된다고 한다. 차가 2만 잔이면 오간 이야기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경륜을 갖춘 원로가 호학(好學)하면서 주변 공동체를 배려하는 모습은 젊은 세대에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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