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향산구로회와 구로정

이정웅 2013. 6. 9. 14:11

향산 구로회와 구로정

 

 

향산의 유래

 

 

 

 

동구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이 있는 산을 향산(香山,160,1m)이라고 한다. 식물에 대한 분류가 오늘날처럼 체계화되지 아니하였을 때 향나무와 측백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아니고 향나무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점은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한자로 괴목(槐木)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천연기념물 제1호가 있는 향산

 

영조 조에 간행된 대구읍지에는 나가산(羅伽山)이라고 했다. 이는 절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관음사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주존 불로 모신 절을 말하는데 관음보살의 성지인 중국 절강성의 보타 낙가산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가산(洛伽山)으로 해야 할 것을 읍지 편찬자들이 착오로 나가산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유생들이였기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기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는 이외에도 사천성의 아미산(보현보살), 산서성의 오대산(문수보살), 안휘성의 구화산(지장보살)을 아울러 불교의 4대 성지라고 한다. 중구 남산동(삼성생명 건너편)에 자리 잡은 동화사 말사 보현사 일대를 아미산(峨眉山)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다.

향산에는 고찰 관음사와 더불어 구로정, 문창후 최치원선생의 영당(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20호)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영정(동 제25호)도 있어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사가 서거정과 향산

 

대구 출신으로 조선 초기 문신으로 활동했던 사가 서거정(1420~1488)은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분이다. 그는 대구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골라 ‘대구십영(大丘十詠)이라 하여 노래했다. 그 중 제6경이 향림이다.

 

고벽창삼옥삭장(古壁蒼杉玉槊長) 오랜 절벽 향나무 옥으로 만든 창같이 긴데

장풍부단사시향(長風不斷四時香) 바람은 그치지 않고 사시사철 향기가 나네.

은근경착재배력(慇懃更着栽培力) 은근히 다시 북돋아 기른다면

유득청분공일향(留得淸芬共一鄕) 맑은 향기 온 고을에 머물게 되리라.

 

제목 ‘북벽향림(北壁香林)’은 북쪽 절벽의 향나무 숲 즉 측백나무 숲을 말한다.

그는 이외에도 제1경 ‘금호범주’ 제2경 ‘입암조어’ 제3경 ‘구수춘운’ 제4경 ‘학루명월’ 제5경 ‘남소하화’ 제6경이 앞서 말한 ‘북벽향림’이고 제7경 ‘동화심승’ 제8경 ‘노원송객’ 제9경 ‘공산적설’ 제10경 ‘침산만조’를 10경으로 꼽았다.

사가의 생존연대를 감안한다면 적어도 15세기에도 측백나무 숲이 무성했고 그가 시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특이한 경관을 연출했음을 알 수 있다.

 

향산과 문학

 

향산이 또 다른 이유로 지역의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이백,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 3대 시인의 한 분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고향 향산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고향을 사랑했고 은퇴 후 아홉 명이 모여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라는 시회를 조직해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옛 이야기를 모를 수 없는 대구지역의 선비들 역시 향산구로회를 조직했다. 대개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시를 즐기는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산 중턱 아슬아슬한 곳에 구로정이라는 정자와 향산 입구 작은 표지판에 이름만 새겨두었지 그 분들의 생몰연도나 본관, 남긴 시문 등을 알 수 없었다.

 

                                      권대자 부회장이 조성 중인 시비동산

 

 

다만 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도윤곤의 성주도씨 문중 자료집을 통해 회원 이름과 출생년도가 있는 자료는 확보했으나 그 역시 남긴 시문이 없었다.

마을사람 중에서 알 만한 사람을 만날 때 마다 구로회원의 자료 수집에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그런 당부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대구문협 권대자 부회장과의 만남

 

2013년 5월 25일 대구문인협회가 주관하는 김삿갓박물관과 청령포 문학기행에 동참했다. 갈 때는 자기소개와 노래 부르기, 올 때에는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혹은 노래로, 혹은 이야기로 회원 각자의 특기대로 진행되었다. 권 부회장 차례가 되었을 때 <향산구로회> 문집을 입수해 번역 작업과 출판까지 마치고 다음 달 회지가 발송될 때 함께 보내주겠다고 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오래 동안 찾던 것이 정말 우연한 기회에 번역까지 완료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뻤다. 며칠 후 배달되겠지만 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5월 29일 미리 전화를 하고 권 부회장이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도동시비동산’을 찾았다.

 

 

향산구로회 문집(복사본)

 

참으로 기이한 인연으로 손에 들어왔으며,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을 깎아서 번역하고 사비로 출판했다고 했다. 지역은 물론 국내 유명 작가들의 시비동산을 조성하는 일만해도 벅찬 일인데 옛날 문집까지 챙긴다는 것은 시나 구청도 못할 일을 해낸 쾌거라고 밖에 다시 할 말이 없다. 책을 받아드니 감개무량했다.

이 분들의 시비도 만들었으면 좋겠으나 자금이 부족하다고 했다. 후손 중에서 아는 분이 있으니 그 분이 주동이 되어 성사되도록 주선해보겠다는 말로 위로하고 나왔다.

 

 

향산구로회현황

 

문집에 의하면 향산구로회는 향산을 중심으로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 1873년(고종 10), 3월 15일에 조직했다. 처음에는 무태 꽃밭소(일명 화담)에 모여 시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번거롭게 되자 행와(杏窩) 곽종태(郭鐘泰)가 향산으로 옮기자고 제안해 이루어졌다. 그 까닭은 물론 백거이의 고사 때문이다.

생년이 가장 빠른 분이 1817년, 가장 늦은 분이 1831년생으로 15살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며, 성씨별로는 경주 최씨가 2명, 성주 도씨가 1명, 현풍 곽씨 2명, 달성 서씨가 2명, 인천 채씨가 2명이다.

성주도씨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향산 인근 마을에 사는 선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름

본관

출생

년도

나이

아호

기문

시문

비고

최운경(崔雲慶)

경주

1817

58

목간

 

1 수

 

채정식

(蔡正植)

인천

1817

58

만호

향산기

(香山記)

4 수

 

도윤곤

(都允坤)

성주

1819

56

낙고

향산기

4 수

 

곽종태

(곽종태)

현풍

1822

52

행와

 

3 수

 

최완술

(崔完述)

경주

1823

51

국오

 

 

 

채준도

(蔡準道)

인천

1824

50

석문

향산기

4 수

 

곽치일

(곽치일)

현풍

1828

46

금상

향산기

1 수

 

서우곤

(徐宇坤)

달성

1828

46

향려

향산기

4 수

 

서영곤

(서영곤)

달성

1831

43

겸산

향산기

5 수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회원 중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분이 늘어나자 결성 후 13년째인 1886년(고종 23년)에 폐지된 것 같으며, 문집은 그 4년 후 1890년(고종 27)에 만들어 진 것 같다.

 

 

 

 

향산의 식물상

 

 

큰구와꼬리풀(촬영지 앞산)

 

향산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 측백나무 숲이 있는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여 년 전 지표조사(경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2003)결과에 의하면 현존하는 개체는 수는 6cm이상이 899, 한두 해 정도자란 어린나무나 257그루라고 한다.

주변의 소나무가 연간 1.01mm, 굴참나무가 1.28mm 자라는데 비해 측백나무는 0.29mm 자란다고 보고했다. 이는 생육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증거라고 한다.

또한 향산에서 측백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4,3%에 불과해 주변에 자생하고 있는 굴참나무 등 다른 넓은잎나무들을 제거해 주지 않으면 점점 도태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6, 625이후 혼란기에 일부가 벌채되는 어려움을 거치고 생육환경이 좋지 못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수령 100여 년 이상 된 측백나무가 899그루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현재 향산에는 총 289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측백나무 숲을 조사했던 일본의 식물학자 나까이가 ‘큰구와꼬리풀’을 이곳에서 발견해 학계에 처음 공개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점이 아쉽다.

 

맺는 말

 

140여 년 동안 장롱 속에 감추어져 있던 문집이 세상에 빛을 본 것은 전적으로 귄 부회장님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향려 서일곤의 <향산기>의 인물평에 목간 최운경은 덕망이 높고, 만호 채정식은 경학에 밝으며, 낙고 도윤공은 성품이 우아하고, 행와 곽종태는 훌륭한 선비를 존경했고, 국오 최완술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석문 채준도는 박학하고, 금상 곽치일은 중후하며, 겸산 서영곤은 온화했으며 본인은 소광(疎狂)하여 참여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이 회를 오래 동안 기억하기 위해 13년 째 되는 해 암벽에 일일이 아홉 명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구로정이 1903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그 때까지 후손들은 상호 교류했던 것 같다.

이 번역 집을 통해 궁금했던 많은 부분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개인 문집이나 행장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모여 선조들이 남긴 아름다운 모임을 새로 결성해 우의를 다지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권부회장의 희망사항이기도 한 회원들의 대표작 한두 편을 시비동산에 세우는 일도 뜻있는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