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판관 서유교와 금호강 돌다리

이정웅 2013. 7. 7. 18:35

판관 서유교와 금호강 돌다리

 

 

 

 

매천대교가 생긴 이후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 이전 시내에서 칠곡으로 오려면 반드시 건너는 다리가 금호강을 가로지르는 팔달교다.

이 다리 칠곡 쪽의 오른 편 끝에 잘 정비된 조경지가 있고 그 가운데 ‘바르게 살자’라고 쓰인 모 단체가 세운 돌비가 있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 보아야 볼 수 있는 후미진 곳에 ‘판관 서유후교 영세불망비(判官 徐侯有喬 永世不忘碑)가 있다.

판관 즉 오늘날 대구시장인 서유교(徐有喬)를 영원토록 잊지 않겠는 뜻으로 세운 비다.

공은 본관이 대구(大丘)다.

세종 때 나라에서 성을 만들기 위해 세거지인 달성이 필요하자 그 곳에 살던 서씨 일가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명하고 보상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굳이 보상을 사양하는 대신에 대구군민들이 나라로부터 빌린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감해 주도록 청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임금이 그의 뜻을 따르는 한편 남산의 역참 터를 하사했다. 감사한 대구군민들이 고마움을 기리기기 위해 구암서원을 짓고 제향한 제처사 구계 서침(徐沈, ?~?)과, 조선 중기 호조,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후손이 연이어 3대 정승 3대 대제학을 배출한 대구 서씨를 반석에 올린 약봉 서성(徐渻, 1558~1631)의 후예다.

 

                         윗대 구계 서침이 나라에 헌납한 달성 원래는 대구 서씨의 세거지였다.

 

공은 남원진병마첨절제사를 지낸 서무수(徐懋修)의 아들로 1792년(정조 16) 38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진사 . 생원 양시에 합격했다.

1849년(헌종 15)대구 판관으로 부임해 와서 1851년(철종 2)까지 약 2년간 대구 판관으로 재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통요충지이자 특히 영남대의 거점지역으로 보부상, 군인, 관리 등 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있던 팔달진 나룻 터에 다리가 없자 공은 개인 사비로 석량(石梁) 즉 돌다리를 놓는 대역사를 완성시켰다.

이에 1851년(철종 2) 10월 서중면(현 대구시 서구일대) 주민이 높이 1m 남짓한 돌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겼다.

 

鬱彼達城(울피달성) 寔公本鄕(식공본향)

遵龜老規(준구노규) 襲藥翁芳(습약옹방)

吏服利器(이복이기) 民頌慈航(민송자항)

自存心思(자존심사) 吉步有梁(길보유량)

 

무성한 저 달성, 이곳은 공의 본향이라.

구계선생(서침)의 법을 본받고, 약봉할아버지(서성)의 꽃다움을 이었네.

향리들이 이로움에 감복하고, 향민이 은혜로 강 건넘을 칭송하네.

본심을 보존하여 백성들을 생각하사 가벼운 발걸음 다리를 놓으셨네.

(번역, 대구향교장의 구본욱박사)

 

 

                              금호강에 사비로 돌다리를 놓은 판관 서유교를 기리는 영세불망비

 

이 교량건설사업은 이전에 있었던 판관 이서(李漵)가 신천에 제방을 쌓고 홍수의 피해를 줄였던 일보다 공사 규모면에서 결코 못하지 않는 큰 역사(役事)다.

그러나 이서의 이공제비는 비각이 지어져 있고, 해마다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데 비해 공은 기리는 것은 차치하고 비마져 팽개쳐 저 있다.

그러나 누군가 바로잡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시내 쪽 팔달교 초입부근에 있던 것을 1977년 이곳으로 옮겨 보존해 온 것은 천만다행이다.

소설가 정만진님은 ‘비석을 팔달교 들머리 잘 보이는 곳에 이전하고, 비각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게 마땅하다’며 덧붙여 ‘대구시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새로 건설되는 도시철도3호선 다리이름을 ‘서유교 다리’나 ‘서유교교(橋)’로 명명하면 좋겠다’고 제의하고 있다.

돌비가 서 있는 마을을 지금도 작원(鵲院) 또는 우리말로 까치원이라고 부른다.

공의 윗대이자 조선전기의 문신인 사가 서거정의 10경 중 제8경이 노원송객(櫓院送客)이다.

북구의 노원동은 일대 대노원(大櫓院)이 있었던데 연유한다. 그렇다면 금호강을 두고 서로 맞닿은 양쪽에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시설인 원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선전기에는 금호강 동안에 그 후에는 서안에 원(院)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