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수박이야기

이정웅 2013. 8. 6. 20:50

 

 재배 중인 수박

신사임당의 그림 '수박과 들쥐'

 

 

수박은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고대 이집트에서 재배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서역을 거쳐 중국 송나라에 들어온 것이 고려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홍길동 전으로 잘 알려진 허균은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도문대작>이라는 책을 통해 소개 했다고 한다.

그 책에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에 귀화해 고려 사람을 괴롭힌 홍다구가 처음으로 개성에 수박을심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2013, 16, 지호진>

홍다구는 고려 충렬왕 때 인물로 몽골 감독관이 되어  고려애 와서 머무는 동안 온갖 형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 종에 내시가 궁궐 주방에서 서과(西瓜, 수박)를 훔쳐먹다가 들켜 곤장 100대를 맞고 영해로 귀양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그 때는 아주 귀한했던 것 같습니다.

수박이 널리 재배된 것은 조선후기라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편에 의하면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244(고종 31)∼1291(충렬왕 17). 고려 원종·충렬왕 때의 문신.
본관은 당성(唐城 : 南陽). 본명은 준기(俊奇), 다구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할아저비는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한 대선(大宣)이며, 아버지는 역시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해 몽고의 고려 침략을 향도하였던 복원(福源)이다.
몽고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으며, 어려서부터 종군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조가 그를 다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었다.
1263년에는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참소해 당시 그가 원에서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을 탈취하였다. 1269년 원종이 임연(林衍)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 다음 해에 국왕 두련가(頭輦哥)를 좇아 3,000명의 귀부군(歸附軍)을 이끌고 처음 고려에 왔다.
이 때부터 봉주(鳳州)둔전총관부(屯田總管府)에 주둔하면서 당시 고려에 있던 부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을 지휘하였으며, 계속해서 1274년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일본 정벌을 위한 군량과 조선의 조달을 감독하였다.
곧 이어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로서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로 돌아갔다.
1277년 진국상장군 정동도원수(鎭國上將軍征東都元帥)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때마침 원나라의 상도(上都)에서 지로와대(只魯瓦歹)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 정벌이 연기되자 승상(丞相) 백안(伯顔)을 좇아 상도를 공략해 전공을 세웠다.
그 해에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해 김방경(金方慶) 무고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에 다시 들어왔다. 김방경을 고문하고 고의로 사건을 확대시켜 고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려다 충렬왕이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벌여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1279년 원나라에서 다시 일본 정벌을 추진하자 동정군(東征軍)의 지휘를 자청하였다. 고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해에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번 역시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곧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 다시 고려에 오지 못하였다.
1284년에도 다시 정동행성우승에 임명되었으나 곧 일본 정벌 계획이 무산되었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이 되었다.
이후 1290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그 해에 내안의 여당인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양행성의 관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