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낙동강 3대 누각의 하나 관수루(觀水樓)

이정웅 2014. 9. 1. 16:13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누각의 하나인 단밀의 관수루

이규보 시판

안축의 시판

점필재와 탁영의 시판

퇴계의 시판

복원하는 경비를 출연한 양도학선생의  공적비

낙단보 건설중에 발견된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432호)

바다처럼 넓은 낙동강

 

낙동강 3대 누각의 하나 관수루(觀水樓)

들어가는 말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 있는 아름다운 관수루(觀水樓)는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낙동강 연안의 삼대 누각의 하나이다.

절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낙정(洛井) 옛 나루터 바로 옆 북쪽 층암절벽에 위치한다. 낙정은 팔공산, 가산, 유학산, 화산, 만경산으로 이어지는 팔공산맥의 가장 북단(北端)으로 영산 팔공의 신령스런 정기가 모인 곳이다.

예로부터 동래와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의 주요 교통로이자 군사적으로 역참(驛站)을 두었음은 물론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보러 가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다.

누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상주의 낙동과 북쪽으로는 낙동강과 위수(渭水)가 합류하는 합강의 절경이 아스라이 보이고 최근에 조성한 낙단보로 수면이 바다처럼 펼쳐진다. 일찍부터 경승이 알려지면서 이규보, 안축, 김종직, 김일손 이황 등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문을 남겼으며 현재 13개의 시판이 걸려있다.

관수루의 연혁

조선 후기 문신으로 대사헌을 지낸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중창기에 의하면 고려 중엽 현 상주시 낙동면 즉 낙동강 서쪽 강가에 지었다가 조선 초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쇠락하자 1653년(효종 4) 목사 이지무(李枝茂)가 수리하였으나 워낙 높은 곳에 있어 비바람의 피해를 많이 받아 부패의 진행 속도가 빨라 다시 기둥이 부러지고 기왓장이 깨져 버렸다.

이 때 목사 김태연(金泰衍)이 몹시 아쉬워하며 역사를 시행하여 1734년(영조 10) 기존의 누각보다 더 크게 짓고 단청도 새롭게 하고 퇴계(退溪)의 시도 걸었다.

청대는 기문에서

‘물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천도(天道)의 지나가고 이어와서 정식(停息)이 없는 것과 같고, 물이 중류(衆流)를 포용하여 맑고 깨끗한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만상(萬象)을 머금어 담연(澹然)히 아무런 생각도 없고 마음이 가라앉아 고요한 것 같다.’

‘발원이 이미 멀고 크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하여 4,5백리를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는 군자의 학(學)이 근본이 성대하기 때문에 날로 그 덕을 더하여 스스로 무궁한 것을 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라고 했다.

청대가 기문을 쓴 이후 1842년(현종 8)년 또 한 차례의 개수가 있었고, 1874년(고종 11) 수해로 유실된 이후 오래 동안 잊혀 져 있었다.

1987년 관수루 중건추진위원회(위원장 김태현, 나중에 이중헌으로 바뀜)가 발족되고 단밀 출신으로 안동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양도학(梁道鶴)씨가 사비 5,000만원을 출연하고 의성군이 일부 부담 공사를 시작해 1989년 114년 만에 새롭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관수루 제영(題詠)

경관이 아름다운 관수루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작품을 남겼으니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 고려 후기 역시 문장가인 안축(1287~1348), 조선조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자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1431~1492), 훈구파의 부패척결에 앞장섰다가 무오사화로 희생된 김일손(1464~1498) 영남학파의 토대를 마련한 이황(1501~1498),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경세가인 허전(1797~1886) 등이다. 이중에서 몇 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낙동강> 이규보 ‘백 굽이 푸른 산속을 / 사이 길로 낙동을 지나온다. / 풀은 깊어도 길은 나있고 / 소나무 고요하니 바람이 없도다. / 가을 물은 오리머리처럼 짙푸르고 / 새벽노을은 삵의 피 같이 붉어 있다. / 누가 게으르게 유람하는 나그네가 / 세상에 시 짓는 늙은이인 줄 알라. ’

<낙동강> 안축 ‘비온 뒤 산 빛이 쪽빛같이 푸르게 물들었네. / 십리에 기이한 바위 수묵화 병풍 같도다. / 자사(刺史, 관찰사)를 환영하는 신안(新案) 마을에서 / 목란단(木蘭丹) 뜬 상봉에 지붕 정자를 세웠네.

<향지(권오복의 자)와 더불어 관수루에 올라> 김일손 ‘늦게 모래 물가에 조각배들을 데었더니 / 가는 말과 오는 소가 바쁘게 오가도다. / 강산은 만고에 다만 이와 같은데 / 인물은 한평생을 길이 쉬어가는 것이라네. / 서쪽으로 지는 해는 물결에 잠겨 아른 거리고 /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다함이 없이 생각이 느긋하다. /멈춘 배에 황혼이 짙도록 혼자 서 있노라니. / 한 쌍의 흰 갈매기 물을 차며 날아오르네.

<낙동 관수루> 이황 ‘우리 남쪽나라 낙수가 / 모든 물중에 으뜸이다. / 누의 이름이 묘한 것을 깨달아 알겠고 / 지세는 자웅(雌雄)을 나눈 것 같이 보인다. / 들이 넓으니 연기는 나무에 엉켜있고 / 강이 맑으니 비도 구름을 거두네. / 바쁘게 나귀 타기를 재촉하니 / 공문(公文)을 일찍 보내려는 것이다.

맺는 말

제영을 남긴 분으로 이들 이외에도 봉창 유항(柳恒)과 아들 유후조가 조선후기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좌의정에 오른 풍산인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 1762~1834)등이 있다.

특히 이렇게 아름다운 명승지가 도나 군 등 관(官)이 아니고 지역유지들의 관심과 고향의 문화유적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비가 바탕이 되어 복원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고향땅의 기운과 바람과 물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어버이의 정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고사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 특히 출향해서 그것이 부(富)든 명예든 자리 잡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한 때 미식가들로 붐비던 낙정 나루터의 그 많던 민물 매운탕집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이제 한 집만 겨우 옛 명성을 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운탕으로 배를 채우고, 관수루에 올라 낙단보로 물을 가두면서 일망무제로 펼쳐진 낙동강의 경승을 구경하고, 오래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려 전기에 조성된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 432호)도 둘러보면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