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단밀 문풍 진작의 산실 봉성서당(鳳城書堂)

이정웅 2014. 10. 6. 09:00

 

의성군 단밀면에 있는 봉성서당 이 서당에서는 문과 급제자 30명 무과급제자 6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1595년 화산후인 고빙운이 기문을 짓고 함안인 조량제가 글을 쓴 현록중수기

봉성서당 현판

봉성서당 중건기 풍산인 유용우가 기문을 지었다.

 

풍양 조씨 등 20개 문중과 뜻있는 분들의 헌성금 현판

 

 

단밀 문풍 진작의 산실 봉성서당(鳳城書堂)

의성군의 최서단에 자리 잡은 한적한 고을 단밀(丹密)은 삼한시대 진한 12국 중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의 고토로, 제천의 의림지나 상주의 공검지와 같은 시대에 축조된 대제지(大堤池)가 있어 일찍부터 벼농사를 지은 수준 높은 농경문화를 꽃피운 고장이다.

또한 신라 3대 무용의 하나인 미지무(美知舞)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고려 태조가 만경산에 용암사를 짓고, 충렬왕(忠烈王)에게 혼자 도끼를 들고 들어가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았던 판도판서(版圖判書, 현, 기획재정부장관) 신원유(申元濡)와 친구인 태조가 형조판서(현, 법무부장관)로 불렀으나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공의 아들 신우(申祐), 목은 이색의 외삼촌 김요(金饒)의 손자로 진주목사를 지낸 김안도(金安道), 황해도관찰사와 이조참의를 지낸 이세인(李世仁) 등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당대 유력한 인사들이 살았던 곳이건만 그 때까지만 해도 크게 문풍이 진작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 주는 기록이 1490년(성종 21) 8, 18자의 <조선왕조실록>이다.

경상도 상주 임내(任內) 단밀현(丹密縣)에 살고 있는 전 현감 김주(金湊)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며, 인재가 거쳐 나오는 곳이니, 관계됨이 지중합니다. 폐현(弊縣)은 본주(本州)에 소속되었으나, 주(州)를 설치한 이래로 별도로 현학(縣學)을 세웠고, 또 학전(學田)을 두어 인재를 교양하였으므로, 이때를 당하여 인재가 배출하여 생원·진사가 된 자가 많았습니다. 하오나 요즈음은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가 퇴훼(頹毁, 무너지고 험)하였기 때문에 생도가 멀리 주학(州學)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현(縣)과 주(州)와의 거리가 50여 리나 되니, 양식을 가지고 왕래하기가 어려워 조용하게 학문에 뜻을 두는 선비가 없고, 모두 궁시(弓矢)를 가지고 말달리기를 좋아하되, 부형 백숙(父兄伯叔)은 태평한 모양으로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시서(詩書)를 일삼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뜻 있는 선비가 있더라도 문업(問業)하는 데 어떠하겠습니까? 신 등은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횡사(黌舍)를 다시 세우기를 허락하시어 인재를 교양한다면 거의 문풍이 다시 한 현(縣)에 진작될 것입니다.”

하니, 어서(御書)로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에 보이었다. 심회(沈澮)·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속현에 별도로 학교를 설치하면 폐단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단밀현(丹密縣)에 별도로 횡사(黌舍)를 세우면 그 늠급(廩給, 나라에서 주는 급료)과 노비를 낼 곳이 없고, 또 제도(諸道)의 속현에서 이를 본받아 무리를 지어서 벌떼처럼 일어나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따르지 마소서.”하였다. 정원(政院)에 묻기를,

“내 뜻은 별도로 학사(學舍)를 세워 인재를 교양하도록 하고, 그 늠급(廩給)과 노비(奴婢)는 적당함을 따라서 마련하여 주려고 하는데, 어떻겠느냐?” 하니, 승지 등이 모두 아뢰기를,

“국가에서 비록 학교를 중히 여기더라도 학관(學官)이 된 자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보기를 여사로 여기어 전념하여 교회(敎誨)하지 않는 죄가 많습니다. 별도로 학사(學舍)를 세우면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을까 저어하니, 해조(該曹)에서 아뢴 대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내용은 현감을 지낸 김주라는 사람이 ‘단밀은 학교가 있는 상주와 거리가 멀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하고 젊은 사람들은 말 타기와 활소기에 여념 없으니 학교를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상소를 올리자 ‘ 왕이 해당 부서로 검토를 하도록 하였으나 해당 부서에서는 아무리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드라도 속현까지는 확대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실록의 기록에서 단밀은 학교는 없었으나 조선 전기까지는 생원이나 진사가 많이 배출되었던 것 같고 일부 주민들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상주까지 가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김주가 상소를 올려 간절하게 바랬던 학교 설립은 그 후 62년 만에 상주목사 신잠(申潛, 1491~1554)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은 신숙주의 증손자로 오히려 그림에 더 뛰어난 목민관이었다. 상주목사로 부임해 온 그가 1552년(명종 7) 관내에 17개소의 서당을 설립하니 단밀의 속수촌에 설립된 속수서당(涑水書堂)도 그 중 한 곳이다.

그러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속수서당도 1592년(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의 피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이곳도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면서 서당은 불타버리고 많다. 1595년(선조 28) 9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으나 역락재(亦樂齋) 고빙운(高聘雲), 호은(湖隱) 신복성(申福誠), 초은(樵隱) 조기원(趙基遠), 수암(修巖) 유진(柳袗), 평해(平海) 구미리(丘美履) 등 여러 선비들이 복구를 서둘렀다.

1703년(숙종 29) 우재 손중돈의 생사당이었던 경현사(景賢祠)가 유림의 공론으로 속수서원(涑水書院)으로 승격할 때 이름을 내 주고 대신 얻은 이름이 현재 불리는 봉성서당(鳳城書堂)이다.

봉성은 봉황(鳳凰)은 곳 단혈(丹穴)에서 난다는 고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단밀(丹密)에서 봉황과 같은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라는 바람을 담이 지었다고 한다.

1700년 (숙종 26) 용암동으로 옮겼다가 1742년(영조 18) 신당으로 이건할 때 생원 하서룡(河瑞龍) 상량문을 찬하고 유학 신한태(申漢台)가 근서(謹書)했다. 1759년(영조 35) 다시 중수하고 1934년 학계를 모으고 임원을 구성하고 수호답(守護畓) 2 두락을 마련하였다. 1991년 5월 17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때 ‘풍양 조씨 남파, 화산(花山) 고씨, 영양 남씨, 고령 신씨, 풍양 조씨 북파, 풍산 유씨, 진양 하씨, 문소 김씨, 함창 김씨, 안동 김씨, 병산(屛山) 손씨, 성산 이씨, 청주 정씨, 봉화 금씨, 경주 노씨, 흥양 이씨, 재령(載寧) 강씨(康氏), 나주 정씨(丁氏), 아주 신씨, 성주 이씨’ 등 20개 문중이 성금을 냈다.

위기지학의 중요성이 땅에 떨어진 지금 선비들의 발길은 멈췄지만 그동안 봉성서당은 문과 급제자 30명, 무과 급제자 6명을 배출하여 크게는 나라를 위한 인재를 배출하고, 작게는 단밀의 문풍 진작(振作)에 기여했다.

한적한 고을 단밀에서 문과급제자 30명을 배출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이런 결과가 있기에는 강의를 맡은 교수들도 훌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분들의 면모와 합격자들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문헌을 확인할 수 없음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