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교회 정문앞에 있는 백합나무 가을에 노란 단풍이 들기 때문에 옐로 포플러라고도 한다.
2014년 설립 100주년을 맞는 남산교회
대구YMCA 전신 교남 YMCA 건물 멸실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민의 성금과 대구Y, 중구청이 노력해 보전했다.
대구 3.1운동의 주역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백합나무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도시다. 그러나 1919년 3.1만세운동은 서울보다 늦은 3월 8에 열렸으니 지리적으로 서울과 떨어져 있었고, 준비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거사를 큰 장날로 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구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 선생이
2월 24일 이만집(李萬集) 목사를 만나 대구 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권유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목사는 남산교회 김태련(金兌鍊) 조사(助事)와 업무를 분담, 본인은 시위 참가자를 물색하고 김 조사는 독립선언서 인쇄 등 거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미리 알아차려 3월 4일 천도교 대표 홍주일이, 7일에는 백남채 등이 채포되었다. 그러나 이 목사와 김 조사는 눈치체지 못해 3월 8일 오후 3시 경 시위현장에 숨어 들 수 있었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 등 참가자들이 8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김태련이 황급히 달구지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 때 주변에 있던 일경이 제지해 다 읽지도 못하고 중단되자 이어 이만집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치자 시위 군중들이 따라 부르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구의 만세운동은 체포된 사람만 무려 157명에 달했다.
그러나 1세기도 안된 시간이 흘렀지만 대구 만세운동의 주역 이만집 목사를 기억하는 사람 없고 그 흔한 기념물 하나 없다.
이 목사는 본관이 경주로 1875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서 태어났다. 25세가 되던 1900년 이 지역을 전도하던 선교사 아담스(J, E Adams, 우리말 안의와, 1906년 계성학교 설립)를 만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아담스가 개설한 계성학교 한문선생으로 초빙되어 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에서 장로로 전도활동을 통해 교회부흥에 노력하여 대구지역 교계에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1912년 보다 체계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부르엔(H . M Bruen, 우리말 이름 부해리, 신명학교 설립자 부마태의 남편)선교사와 함께 남산교회설립에 전도사, 장로로 참여하고 1917년 남산교회, 1918년에는 제일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 1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3년 형의 징역을 받았으나 2년 만에 출소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교세는 많이 약화되고 그나마 내분이 일어나 선교사들과 대립하다가 1923년 드디어 목회자로서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잇따라 있었던 법정싸움에서도 패소하자 고향 경주로 내려가 과수원을 경영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양관을 세우고 기도생활을 하던 중 194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니 향연 69세였다.
전통적인 유학자였던 그가 기독교에 입문,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외 일본제국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무던히 애썼다.
특히, 1915년 미래의 희망이자 장차 조국을 이끌어 갈 청년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김태련, 백남채와 더불어 교남기독교청년회 즉 대구YMCA를 조직했다. 이후 그는 회장, 김태련은 총무가 되어 대구지역 청년들을 결집시켜 선교활동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다.
2014년 부해리, 맹의와에 이어 3대로 목회한 남산교회는 100년을 맞고, 이듬해에는 그가 창립한 대구YMCA도 100년을 맞는 겹경사 다가오고 있다.
또한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고, 2005년에는 경북노회로부터 복권되었다.
남산교회 정문 앞에는 백합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북아메리카 원산이나 우리나라에도 잘 적응해 전국적으로 많이 심어지고 대구의 명소 동성로에도 심어졌다.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들어 옐로우 포플러(Yellow poplar)라는 별명도 있다. 이 생명력이 강한 나무를 이만집 목사를 기리는 표석을 대신하는 나무로 삼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리는 기념물로 대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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