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서원 입구 큰 길가의 왕버들, 가칭 '추적나무'
인흥서원
명심보감의 저자 추적선생신도비
명심보감 판각(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37호)
명심보감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인흥서원 현판 글씨, 필자의 방계 선조 공조판서 응와 이원조의 작품
추적 등을 기리는 문현사
인흥서원 강당
명심보감의 편찬자 노당 추적과 본리마을 왕버들
언젠가 모 처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광산 김 씨의 종손(?)이자 방송인인 김병조 씨가 대만을 갔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현지 대학의 한 교수를 만났다.
대한민국의 유명 방송인을 알아 본 그가 ‘달성군 화원에 있는 인흥서원을 가 보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조금은 이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김병조 씨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당신은 명문가의 후예답게 방송 중 <명심보감>을 자주 인용하는데 그 책을 인쇄한 판본이 대구 인흥서원에 있어 나는 가 보았는데 당신도 가보았을 것 같아 물어 본다’. 고 했다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병조 씨가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대구사람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채근담>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수신서(修身書)인 <명심보감>의 판본이 보관된 곳이자 편찬자를 기리는 서원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계선(繼善) 즉 ‘착한 일을 이어가라’는 편을 비롯해 총 19편으로 구성된 <명심보감>은 ‘마음을 밝게 하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제작된 책이다. 일생에 있어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바른 사회인이 되는 것을 목표를 달성하는 방편으로 여러 고전에서 금언과 명구를 편집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천자문>을 익힌 다음 <동몽선습>과 함께 교재로 사용되든 책이나 성인들도 집에 비치해 두고 수시로 보는 책이다.
편찬자 추척(秋適)은 본관이 추계(秋溪,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로 아호는 노당(露堂)이다. 1246년(고종 33)에 태어났다. 충렬왕초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 직사관을 거쳐 좌사간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현,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을 현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부당함을 들어 서명을 거부하자 그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 감찰기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 신의주 부근)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 최원충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때 시대를 초월해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리가 담긴 교양서<명심보감>을 편찬하였다.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에 이르러 물러났다. 1317년(충숙왕 4)돌아가니 향년 71세로 대구의 인흥서원, 부여의 충현사에 제향 되었다.
인흥서원은 1825년(순조 25)에 세워졌다. 문정공 회암 추황(秋篁), 문헌공 노당 추적(秋適), 운심재 추유(秋濡), 충장공 세심당 추수경(秋水鏡) 등 네 분을 제향하고 있다.
특히, 장판각에 보존 중인 명심보간 판본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1869년(고종 6) 후손 추세문이 국역하여 출판함으로써 대중적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그 후 이 책은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도 번역되어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혹자는 1393년 중국의 범입본(范立本)이 편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가 1305년 또는 1315년이라고 볼 때 무려 88년 내지 78년 차이가 나고, 노당의 손자 추유(秋濡)가 중국으로 건너가 전파하였다는 시점인 1363년으로 보아도 30년 후인 점을 감안하면 노당의 편찬이 맞다고 한다.
세태가 그러하듯 한 때 선비들로 붐볐던 많은 서원이 그 기능이 사라지면서 건물만 덩그러니 유지되고 있을 뿐 문이 굳게 닫혀 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르다.
소보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손 추연섭 옹이 91세라는 적지 않는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서원의 내력과 명심보감의 가치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최근 달성군 화원읍 본리 마을이 뜨고 있다. 이 서원과 더불어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시 민속자료 제3호) 이외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었으나 얼마 전 용문계곡에 휴양림이 들어서고, 산동네 마비정이 벽화마을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찻길이 비좁을 정도다.
그러나 동양최고의 수신서라는 명심보감의 산실인 이곳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아 서원 입구의 큰길가의 왕버들을 ‘노당 추적나무’라고 이름을 붙여 안내판 대용으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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