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정부인 열녀 달성 서 씨와 흰 대나무

이정웅 2014. 5. 19. 07:42

 

 초상화의 대가 이명기가 모사한 백죽도

 열녀 정부인 서 씨를 기리는 백죽각

 세종의 시 두 수

 남편 도운봉선생의 유허비

 

 

얼굴은 이명기가 몸체는 김홍도가 그린 서직수 초상화(보물 제1478호) 

 

 

정부인 열녀 달성 서 씨와 흰 대나무

대구보건대학 도성탁 교수와 지인 몇 분이 군위 효령에 있는 백죽각(白竹閣)을 찾았다.

얼마 전에 들은 소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출발하기 며칠 전이었다. 도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구의 역사와 문화, 식물에도 관심이 있는데 시간이 나는 데로 한 번 뵈옵자고 했다. 기꺼이 승낙하고 그 후 어느 날 도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전해들은 이야기. 즉 ‘서사달(徐思達)의 딸 서(徐)씨가 28세 되던 해 남편 도운봉(都雲峯)이 결혼 5년 만에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날마다 집 뒤 대숲에 가서 대나무를 끌어안고 울었더니 어느 날 갑자기 흰 대나무(白竹) 세 떨기가 솟아나 3년이 지나자 18 떨기에 이르렀다.

이 신비스러운 일이 경상 감사의 장계에 의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1438년(세종 20) 왕이 명하여 그림<백죽도(白竹圖)>으로 그려 오라하고 이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홍살문을 세우라 하고 두 편의 시까지 써 주었다.

시문은 다음과 같다.

호천포죽제환란(號天抱竹泲汍瀾), 가신 님 부르며 대를 안고 눈물 흘려

일야신황백수간(一夜新篁白竹竿), 어느 날 밤 흰 대가 몇 떨기 돋아났네.

고절늠연경세속(高節凜然驚世俗), 고절한 절개의 의연함에 세상이 놀라니

구중묘상화도간(九重描上畵圖看), 궁궐에서도 그려 올린 그림을 감상하네.

또 말하되(又曰)

천고소상원불궁(千古瀟湘怨不窮),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함없어

연년죽상현반홍(年年竹上見斑紅),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드러나네.

수지소절무금석(須知素節無今昔), 모름지기 깨끗한 절개 예나 지금 다름없어

백순신생일량총(백순신생일량총), 한 두 떨기 하얀 대가 새로 돋아났네.

그런데 그 때 세종대왕께 그려 올렸던 흰 대나무 그림이 오래되어 색이 바래지자 후손 석사 도필구(都必九)가 장수도(현, 영천시 신녕) 찰방(역장)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에게 부탁하여 1795년(정조 19)에 새로 모사한 그림 <포죽도>가 KBS 진품명품에 나와 감정가 10억이 매겨졌다는 내용을 혹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운봉의 방계 후손인 만큼 가보고 싶다면 현장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날을 잡아 백죽각(白竹閣)으로 향했다. 도 교수가 미리 연락을 해 두었든지 후손 몇 분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각(閣) 입구에 돌로 계단을 만드는 등 정성스럽게 가꾼 흔적이 뚜렷하나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다.

성군 세종이 서 씨의 열행(烈行)을 높이 사서 직접 시를 지어주고 부역까지 면제해 주며 격려한 분을 기리는 곳이라고 보기에는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점도 아쉬웠다.

원래 효령면 관동 병수1 리 큰길가에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어 1731년 (영조 7) 재건했다. 왕의 친필이 모셔진 엄숙한 공간이라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예를 갖추어야 하고, 특히 권세 있는 관료나 말을 타고 가는 선비도 내려서 지나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자 1795년(정조 19)과 1796년(정조 20) 사이에 지금의 장소 성2 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림은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진품 명품’ 팀이 군위로 출장 감정 왔을 때 보였더니 당황한 감정사가 보다 더 알아볼 것이 있으니 다음 ‘진품 명품’ 시간에 작품을 가지고 직접 출연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현장에 없었다. 워낙 높게 매겨진 가격이라 혹 있을지 모를 도난에 대비해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궁금했던 흰 대나무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느 때인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현존한다면 좋은 볼거리가 되고, 증식해서 팔기라도 한다면 떼돈도 벌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세속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이 미담은 <조선왕조실록>, <속 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포죽도(抱竹圖)를 모사한 이명기는 궁중화원(宮中畵員)으로 생존 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초상화를 잘 그려 김홍도가 몸체를, 그가 얼굴을 그린 ‘서직수 초상화(보물 제1478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을 만큼 초상화에 뛰어난 화가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