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생육신 경은 이맹전선생과 용계서원 부조묘의 향나무

이정웅 2014. 6. 9. 06:05

 

 경은 이맹전선생의 부조묘 안에 있는 향나무

 경은 선생의 부조묘

생육신을 기리는 용계서원

 

생육신 경은 이맹전선생과 용계서원 부조묘의 향나무

 

 

 

 

 

옛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의 중책을 맡기에 앞서 먼저 몸과 마음을 닦는 극기(克己)와 수신(修身)을 중시했다.

그 증표는 나무를 선택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나무 대나무 등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상록수를 심거나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나 국화를 좋아하는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고택을 방문해 보면 대나무가 에워싸고 있거나 큰 소나무가 있게 마련이다.

그 이외 회화나무나 은행나무도 심는데 이는 배움의 연원을 유학에 두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영천은 예외적으로 임란 의병장 정세아의 호수종택에는 향나무를 역시 임란 공신이자 관서지역 문풍을 진작시킨 조호익의 지산고택에는 사철나무를 심었다.

조려 등 생육신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는 영천 자양면 용산리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안에 있는 경은 이맹전(李孟專, 1392~1480)선생의 부조묘(경북 유형문화재 제53호)에도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경은 선생은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윗대는 성주 북면 명곡촌(현 성주군 초전면 홈실)에 에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선산, 남면 형곡촌(현 구미시 형곡동)으로 옮겨 살았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심지(審之)이며, 어머니는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해(呂克해)의 따님이다.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1436년(세종 18)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외직을 자원하여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구미시 선산읍 망장촌(網障村, 선산의 진산 비봉산에 깃든 봉황이 날아가 지기(地氣)가 쇠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물로 비보했다는 뜻을 가진 마을, 현 고아읍, 오로리) 처의 고향으로 낙향하여 귀머거리와 장님이라 핑계대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1480년(성종 11) 돌아가시니 향연 88세였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점필재가 쓴 <이준록(彛尊錄)>에 의해 세상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1781년(정조 5) 영의정 서명선의 건의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의 서산서원과 영천의 용계서원에 원호, 김시습, 조려,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또 구미의 월암서원에는 김주(金澍),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와 함께 제향 되어 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정간은 ‘조용히 즐거워하면서 끝까지 잘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 하고, 정직하여 사(邪)가 없는 것을 간(簡)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공이 실제로는 아프지도 않으면서도 귀머거리와 장님 행세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했는지 가족들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찾아오면 술잔을 나누며 끼니를 거를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점필재가 ‘병이 거의 다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공이 이르기를 ‘병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 군자가 누추한 집에 찾아오니 가슴이 확 트여서 그러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청빈한 생활을 강조해 먼 길이 아니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조차 금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부조묘(不祧廟,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나라에서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 사당)는 1786년(정조 10) 나라의 명으로 지은 것이다.

서원을 포함한 경내에는 모두 3그루의 향나무가 있는데 부조묘의 것이 제일 오래된 것 같고 나머지 2그루는 그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후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건강하게 자라 서원과 잘 어울리나 부조묘 담장 밖 북쪽의 단풍나무 한 그루는 수세가 너무 강건하여 부조묘의 향나무 생장에 장애를 주고 있다.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12월 중순 한겨울인데도 향나무는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경은 선생의 충절이 수액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벽진 이씨가 영천에 자리 잡은 것은 장사랑을 지낸 이배원(李培源)이 세조의 변을 한탄하며 선산에서 처향으로 은둔하면서 부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