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병자호란 공신이 제향(祭享) 된 용강서원

이정웅 2014. 11. 19. 18:29

 

 

병자호란 공신 상무헌 허득량과 낙암 허복량, 고려 문신 충목공, 허유전을 기리는 용강서원 강당

성서도서관 앞 녹지에 있는 김해허씨세거장비

두 공신과 충목공의 위패를 모시는 충렬사

충목공 허유전의 유적비

서원이 있기전에 두 공신을 기렸던 용강재

 

병자호란 공신이 제향(祭享) 된 용강서원

와룡산 권역에는 3개의 서원이 있다. 성주인 양직당 도성유(1571~1649)와 공의 종제인 서재 도여유(1574~1640), 서재의 아들 지암 도신수(1598~1650)를 기리는 달성군 다사읍 서재마을의 용호서원(龍湖書院)이 그 한 곳이요, 다음은 역시 도문(都門)의 취애 도응유(1574~1639), 낙음 도경유(1596~1637)를 기리는 달서구 용산동 서촌마을의 병암서원(屛巖書院)이고 세 번째로는 김해인 상무헌 허득량(1597~1637)과 공의 종제 낙암, 허복량(1602~1637)과, 충목공 허유전(1243~1323)을 기리는 달서구 이곡동 선원마을의 용강서원(龍岡書院)이 그곳들이다.

이 세 곳 중에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곳은 김해 허씨 현감공파의 용강서원이다.

‘김해허씨세거장비(金海許氏世居庄碑, 성서도서관 앞)’에 의하면 본관지가 김해인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 종7품)을 지내고 임란 때 의려(義旅,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병사)한 12세 묵재(黙齋) 허승립(許承立)으로부터 비롯된다.

현재 선원, 망정, 장동, 갈산에 거주하는 허 씨들의 입향조로 시기적으로는 임란 후 즉 17세기 전반이나 중반이 아닌가 한다. 일설에는 임란 중 선산에서 전공을 세운 뒤 그곳에 은거했다가 1622년(광해군 14) 가족을 거느리고 현 구미시 도개를 지나 본향 김해로 내려가던 중 이곳의 풍물에 반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용강서원은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과,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 두 분을 기리기 위해 1804년(순조 4)년 세워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할 때 두 분의 9대조 충목공(忠穆公) 혀유전(許有全)이 추가로 제향(祭享)되어 오늘에 이른다.

제향 된 세 분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상무헌 허득량은 1597(선조 30)~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상무헌(尙武軒)이다. 처음 대구 성서에 터를 잡은 승립(承岦)의 손자이다.

김상용·김상헌형제에게 수학하고,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과 임경업장군에게 무예를 배웠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도사·훈련원부정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별장으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3등에 등록되고 부호군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에 들어가 광주 쌍령(雙嶺)에서 수많은 적군과 싸우다가 종제 복량(復良)과 함께 전사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용강서원에 제향 되었다. 1842년(헌종 8) 8대손 석화(錫華)가 공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상무헌유고〉가 전한다.

낙암 허복량의 아버지는 운로(雲老)이다. 김상용·김상헌의 문인이다. 관이 부총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득량(得良)과 함께 광주 쌍령(雙嶺)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陣)에 나아가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충목공 허유전은 1243(고종 30)~ 1323(충숙왕 10). 고려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충주사록(忠州司錄) 연(延)이다. 원종 말 과거에 급제했다.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왕의 측근으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순마소에 갇혔다가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안렴사를 지냈으며, 1304년(충렬왕 30)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07년(충렬왕 33)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으며,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도첨의참리·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가락군의 봉호를 받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후에 수첨의찬성사로 치사(致仕)했다가 다시 정승으로 복직했다. 충선왕이 토번(土藩, 티베트)으로 귀양 가자 왕의 환국을 청원하기 위해 81세에 민지(閔漬)와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왕(瀋王) 고(暠)와 그 일당들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이웃 병암서원에 제향 된 낙음 도경유 선생도 광주 쌍령 전투에 참가했다.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던 대구 사람들의 궐기는 거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는 이런 충의가 넘치는 사람들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 서원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