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서원의 연혁과 제향인물
들어가는 말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성균관 등 관학(官學)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이러한 사학(私學)을 장려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훈장이 공부만 시키는 서재와 달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현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영주의 백운동서원으로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이다. 안향(安珦)을 제사의 대상으로 하고 학규는 주희가 세운 중국의 백록동서원의 것을 본받았다. 그 후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후임으로 와서 사액을 요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실현하여 서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속수서원 전경
사액은 편액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 관리를 위한 토지와 노비, 다량의 서적이 부수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 하에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미 명종 때까지 거의 2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는 50여 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의 서원이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지역의 사림들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는데 고을의 수령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원의 인적 구성은 원임(院任)과 원생(院生)으로 나누어진다. 원임은 원생의 교육과 서원의 제반 대소사를 관장하는 책임자인 원장(院長)을 비롯하여 서원의 향사(享祀)·교육·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들로 구성되었다.
원생은 양반 자제들 가운데서 유교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생원·진사·초시입격자·유학(幼學)들로 구성되었다.
속수서원 명륜당
이들 원생들에 대한 교육과정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성리학의 교육과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었다.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사적 제55호), 경주시 안강읍의 옥산서원(사적 제54호),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도동서원(보물 제350호),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의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안동시 풍천면의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등이 있다.
서원의 연혁
1506년(종종 1)은 박원종·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신윤무(辛允武, 군자감 부정), 박영문(朴永文, 군기시 첨정) 등과 함께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시킨 해였다.
그 해 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파직되었던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은 상주목사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는 청백리답게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주민들을 잘 교화시키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당시는 주업이 농업이었고 농업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는데 수리시설이 부족한 당시로서는 풍흉을 하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상주지역에 극심한 한해(旱害)가 발생했다.
그 중에서 단밀은 피해가 더 컸었다. 그는 고향 안강과 강동으로부터 곡식을 운반해 와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주민을 구휼(救恤)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쯤 주민들이 상소를 올려 계속해서 다스려 주기를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다시 더 근무하다가 1509년(중종 4) 우승지로 승진했다.
그는 상주 목사 재임 중 선정을 펼친 공으로 두 차례에 걸쳐 임금으로부터 비단과 옷감을 하사받았다.
속수서원 경현사
그가 수령직을 마치고 떠난 1509년(중종 4) 재임 시 베풀어 준 은혜를 감사하게 여긴 단밀 사람들이 속수촌에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건립하고 화상(畵像)을 그려 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 후 1552년(명종 7) 목사 신잠(申潛)이 속수서당을 우재의 생사당 경내에 세웠다. 이로서 지역 주민들은 우재(愚齋)를 기리고 있는 공간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조용하기만 한 시골 단밀도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만다.
생사당은 물론 현(縣) 내 유일한 강학기관이었던 속수서당도 불타서 재가 되고 말았다.
1635년(인조 13) 전식(全湜), 이준(李埈)이 건의하여 생사당을 중건 봉향하다가 1645년(인조 23) 조광영, 권육, 손극창, 정경세, 이준, 전식, 신열도, 이원규, 김응조 등이 경현사(景賢祠)를 건립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656년(효종 7) 완공하면서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퇴재(退齋) 신우(申祐)도 병향(並享)하였다.
그 후 1703년(숙종 29) 유림의 공론으로 속수서원(涑水書院)으로 승격시키고 1730년(영조 6)에는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 검간(黔澗), 조정(趙靖)을, 1826년(순조 26)에는 가규(可田+圭) 조익(趙翊)을 추가로 배향했다.
1871년(고종 6) 훼철되었다가 100년 후 1971년 조성학, 신기성, 김영해 등이 중심이 되어 명륜당을 세우고, 1983년 단소(壇所)향사를 시행했다.
1989년 군비보조와 유림의 찬조, 후손들의 성금으로 경현사 및 내삼문을 다시 건립하니 생사당 건립 후 480년 만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속수서원 중건기
배향인물
0,신우(申祐)
생졸년 미상.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퇴재(退齋). 부친은 신원유(申元濡)로 고려 충렬 때 판도판서‧군기시별검교사를 지냈다.
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사헌부장령을 거쳐 호군(護軍)과 전라도안렴사(全羅道安廉使)에 이르렀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 상 시묘살이에 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아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쌍출(雙出)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지금의 주선 2리 관동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정몽주에게서 대의를 들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 단밀의 만경산(萬景山)에 은거하였고 태조와 친구 사이로서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행실은 『국사』‧『여지승람』‧『삼강록』에 실려 있다.
묘소는 경북 의성군 구천면 용사1리 산39번지에 있다. 우복(愚伏) 정경세는 묘표(墓表)를 김응조(金應祚)는 봉안문(奉安文)을 채문숙(蔡文肅)은 유허비명을 찬(撰)하였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도 배향되었다.
저술은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 있다.
0, 손중돈
1463(세조 9)∼1529(중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호는 우재(愚齋). 아버지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이며, 어머니는 유복하(柳復河)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2년(성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양산군수, 이어 성균관 사예·사복시 정으로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 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직후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1509년(중종 4)에는 표리(表裡) 1습(襲)을 하사받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 공조·예조 참판을 역임하다가 1517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을 지낸 뒤 도승지를 세 번, 대사헌을 네 번 지냈으며,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경주의 동강서원(東江書院)에도 제향 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0,김우굉
1524(중종 19)∼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아버지는 부사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淸州郭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해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에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 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 가자,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했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저서로 『개암집』이 있다.
의성군 단밀면 속암1리 일명 고실마을
0, 조정
1555(명종 10)∼1636(인조1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검간(黔澗).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다.
0, 조익
1556(명종 11)∼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가규(可畦).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8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필선·병조좌랑·광주목사(光州牧使)·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맺는 말
속수서원은 상주목사였던 우재 손중돈이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단밀현 사람들을 사재(私財)로 구휼한 것에 감사한 주민들이 생사당으로 건립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703년(숙종 29)에 우재와 고려 조 안렴사를 지낸 신우을 배향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사당이 서원으로 승격되기에는 조광영, 권육, 손극창, 정경세, 이준, 전식, 신열도, 이원규, 김응조 등 이름만으로도 알만한 당시 명사들의 노력이 컸었다.
서원이 이루어지기에는 배향인물의 학덕이 높아 존경받는 인물이어야 하고 사림(士林)의 공의를 거쳐야 하는 점에서 아무렇게나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을은 크지만 서원이 없는 곳이 많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단밀이 문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속수서원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속수서원 사적비
서원 이름 속수(涑水)는 봉성서당의 원래 이름 속수서당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실 마을 뒤쪽 벌뫼산 끝자락에 중종 때 이조참의를 지낸 성산인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1452~1516)이 소요하든 속수정(涑水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사수(泗水)가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강인 것처럼 속수는 중국 북송의 대유학자로 일명 속수선생(涑水先生)으로 불리는 사마광(司馬光)의 고향에 있는 강이다.
한강 정구가 만년에 대구시 북구 사양마을로 옮겨 살면서 그곳을 사수(泗水)라 한 것처럼 연담도 속수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닮으려고 정자(亭子) 이름을 속수로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좌의정 유후조의 아들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1813~)이 속수정중건기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합격자 등 단밀에 인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 연원(淵源)이 속수서원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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