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서상돈 선생 송덕비 발견 전말

이정웅 2014. 10. 9. 09:30

 

천주교 대구교구청 내 서상돈선생 상

 서상돈 선생이 심은 히말라야시더

칠곡향교 내 서상돈 선생 송덕비

매일신문 보도(2013)

 

서상돈 선생 송덕비 발견 전말

배석운, 한영기 등 칠곡 토박이 몇 분들의 권유로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팔거(八莒)는 대구지역의 칠곡 즉 팔달교 서북쪽의 북구 관문동, 태전1,2동, 구암동, 관음동, 읍내동, 동천동, 국우동 등 8개동의 고려시대 이름으로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해 정체성을 찾자는 취지에서 모인 단체다.

내당동에 오래 살다가 칠곡으로 이사 온 것은 3년 여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만나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어느 날 칠곡향교 총무장의(掌議)로 있던 옛 동료 최무달님의 권유로 향교행사에 참여할 때도 있었고 이어 문화관 준공식에는 황금회화나무 2그루, 정당매 1그루를 기증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문화관을 새로 지으면서 안팎에 흩어져있던 빗돌들을 한군데 모아 정리해 놓은 곳이 있었다.

돌에 이름과 공적을 새겨 오래 동안 칭송받는 분들이 누구 일까가 궁금해 살펴보던 중 서상돈(徐相暾,1851~1913)선생의 송덕비를 발견했다.

이외였다. 2,000만 동포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일본에 진 나라 빚을 갑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 공덕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은 대구 시민 누구에게나 존경하는 분이지만 나 역시 대구 시민임이 자랑스럽게 한 분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따라서 2007년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에는 회장으로 있던 달구벌얼찾는모임에서 작은 행사를 진행한 바도 있었다.

즉 미래 대구사회를 이끌어갈 청소년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유적지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이런 애국운동이 서울이나 다른 지역이 아니고 우리 지역에서 우리 선조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향후 훌륭한 인물로 자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다행히 대구시 공모사업에 채택되어 회원들과 힘을 모아 국채보상대구군민대회가 열렸던 북후정(北堠亭)의 옛터, 즉 시민회관(최근 이 자리가 아니고 옛 서문시장의 어느 자리라는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임경희 박사의 주장이 받아드려지고 있다)에 대구상공회의소가 세운 국채보상운동상징조형물-부사장 서상돈님이 처음으로 취지를 발의한 대구광문사 터-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고택-범물동 묘소 등과 천주교대구교구청 내 공이 직접 심은 히말라야시더를 담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묵은 인연이 있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칠곡향교의 송덕비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비문을 촬영해 구본욱(대구향교장의) 박사에게 보냈더니 1912년 10월 감독(監董, 조선 시대, 국가의 토목 공사나 서적 간행 따위의 특별한 사업을 감독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임시직 벼슬) 최인술(崔麟述), 서남규(徐湳奎) 책임 하에 칠곡지역의 4개면 주민들이 세웠으며

‘하늘이 어진 이를 내리 사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네.

(天降仁善, 救靈萬民)

곳간(창고)을 열어 혜택을 베풀어 곤궁한 백성들을 구휼하셨네.

(損廩施惠 賙窮恤貧)

일찍이 농업정책에 정성을 다하고, 세금을 공평하고 정성스레 거두었네.

(早誠耕稼 平均款收).

그 공덕을 조각돌에 새겨 천추만년 빛나게 하리라

(記功片石 生色千秋)’ 라고 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이 비문은 서상돈 선생이 애국자이기도 하지만 시찰사(視察使)라는 세금을 거두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한 훌륭한 공직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발견한 2013년은 공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매일신문 이대현 부장에게 자료를 보냈더니 이화섭 기자가 취재하여 1면에 비교적 크게 보도해 주었다.

보도가 된 그날 저녁 경쟁사인 모 일보의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때까지 그 일보의 특정부분에 자문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자문도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인연도 끊자고 했다.

내용인즉 ‘어떻게 우리 신문에 자문을 하고 있으면서 중요한 기사거리를 다른 신문사에 주느냐’ 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서상돈 선생은 천주교대구교구청 부지를 제공할 만큼 독실한 천주교인이고, 또 매일신문은 서상돈 선생을 현창하기 위해 ‘서상돈상(徐相暾賞)’을 제정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기업경영자에게 해마다 시상을 하고 있으므로 공에 관한 일은 매일신문에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에피소드는 그 비가 향교에 서 있었던 것이 100년이 넘었건만 그것이 서상돈 선생의 송덕비라는 것을 누구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사 온지 몇 년 안 된 사람에게 발견되고 비문의 번역자 대구향교 구(具) 장의라는 점에서 일부 칠곡향교 관계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그 후 이 비를 보기 위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많은 사람이 다녀갔고 지금도 가끔 비문을 탁본해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발견한 나는 좋은 일을 하고도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