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의 자연관이 응축된 공간 심원정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 있는 심원정(心遠亭)과 그에 딸린 원림(園林)은 다른 정자나 원림에 비해 규모도 작고 면적도 그리 넓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담양의 소쇄원이나 밀양의 월연정처럼 오래된 정자도 아니다. 특히 이들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니며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아주 작은 공간이다.
심원정 전경
그런데도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영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원림이고, 조선시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정치제도가 바뀐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 와중에도 도연명의 전원과 주자의 성리학적 바탕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한 선비가 은거하며 장수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원림의 경영자 기헌(寄軒) 조병선(曺秉善, 1873~1956)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정자 이름 심원정을 도연명(陶淵明, 365~427) 의 <음주(飮酒)> 20수 중에서 제5수의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에서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에 오두막을 지었지만, /결려재인경(結廬在人境)
수레 끄는 소리 말 울음소리로 시끄럽지 않네. /이무거마훤(而無車馬喧)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문군하능이,(問君何能爾)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절로 외딴곳이 되는 법.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 / 유연경남산 (悠然見南山)
산 기운은 해 저물어 아름답고 /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새들은 짝지어 돌아오누나. / 비조상여환(飛鳥相與還)
이 가운데 참뜻이 있어 / 차중유진의(此中有眞意)
말로 드러내려다 할 말을 잊고 말았네./ 욕변이망언(欲辨已忘言)
라는 시(詩)로, 몸은 비록 속세에 있지만 마음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나 있고 찾아오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문 앞이 항상 조용하다는 뜻이다.
심원정 주변
그는 또 마루를 이열당(怡悅堂)이라고 한 것은 도연명의 시‘ 편히 즐기다’에서, 정운루(停雲樓) 즉 ‘구름이 머무는 누각’ 역시 도연명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연에 순응하며 은자(隱者)로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자로서 학문적인 성취도 이루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즉 주자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한 한 점이다.
정자의 또 다른 이름 위류재(爲留齋)는 주자의 시 ‘산수위류(山水爲留)’ 즉 ‘손님을 맞이한다.’라는 뜻이고 거처하는 방, 암수실(闇修室)은 ‘몰래 수양하는 방’ 역시 주자의 말이라고 밝혔다.
심원정 25영 시판
특히, 심원정 25영 중 은병(隱屛)은 주자(朱子, 1130~1200)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제7곡에 나오는 이름이다. 중국 무이산의 은병은 무이산의 중심으로 주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무이정사가 있는 곳과 가깝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은병봉 옆에 선장봉이 있는 데 반해 기헌이 읊은 은병은 정자 주변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바위를 말하는 점이 다르다.
심원정 25영(詠) 중 정자 밖의 20 영 즉 은폭이나 군자소 같은 곳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공간이다. 이런 소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해 그 만의 소우주를 만들었다.
그는 물속의 한 바위를 지주암(砥柱巖)이라 하여 중국 황화의 격류 속에서도 우뚝 솟아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바위와 같은 이름을 지어 스스로 선비정신을 꺾이지 않으려고 했고, 또한 숨어 살기를 작정했지만 그렇다고 외부와 단절한 채 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고 담소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자기만의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어 수시로 변화는 주위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던 기헌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선비정신이 살아 숨 쉬는 심원정은 이래서 더 특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심원정의 편액은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서화가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 1874~1947)의 글씨라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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