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단밀의 나정승(羅政丞)과 나정(羅亭)이야기

이정웅 2015. 1. 9. 12:27

 

단밀의 나정승(羅政丞)과 나정(羅亭)

의성군 최서단에 위치한 단밀면(丹密面)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적한 시골이지만 역사가 오랜 뿌리가 깊은 고을이다. 남쪽은 높은 만경산이 버티고, 서쪽은 낙동강이라는 큰 물줄기가 가로 놓여 있으며 북, 동쪽은 위천이 감아 돌아 땅은 기름지지만 교통은 불편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된 환경이 독자적으로 살아가기에는 좋았던 듯 삼한시대에 난미리미동국이라는 성읍국가가 존재했고, 수전(水田)경작 즉 벼농사가 시작될 즈음에는 상주의 공검지와 비슷한 시기에 대제지(大堤池)가 축조되었다.

당시 삼한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좋아해 신라의 3대 음악의 한 종류인 미지무(美知舞)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런 긴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시대에는 문소군(지금의 의성군)에 고려 초에는 상주목(지금의 상주시)에 병합되어 1906년까지 그대로 유지되다가 1907년에는 비안군(지금의 비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의성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따라서 고려 초와 대한제국까지 890년 동안 상주관할이어서 많은 사료들을 <상주목읍지>나 <상산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정승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위중1, 2리일대

 

단밀의 토성, 나(羅) · 손(孫) · 신(申)

<경상도지리지, 1425, 세종 7>에 의하면 단밀현의 토성(土姓)은 나(羅)·손(孫)·신(申) 세 성바지이다. 즉 이들이 당시 단밀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 뿌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성씨는 아주(鵝州) 신 씨 밖에 없다. 입향조 신윤유(申允濡)는 고려 제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도끼를 가지고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 간언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고려가 기울자 낙남하여 만경산 밑 주선 2리 속칭 관동(官洞)에 자리 잡았다.

공의 아들이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퇴재(退齋) 신우(申祐)로 아버지 윤유(允濡)가 죽자 3년간 여막(廬幕)에서 생활할 때 무덤 앞에 쌍죽(雙竹)이 돋아나 세인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라고 칭찬했으며, 정려가 세워져 지금도 관동에 효자비가 남아있다.

이후 후손들의 일부가 봉양면과 의성읍 쪽으로 이거하여 1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 하여 사촌의 안동김씨 12명에 이어 두 번째로 사마시(생원, 진사시) 급제자도 안동김씨 27명에 이어 22명이나 되어 의성의 문풍 진작(振作)에 크게 기여했다.

의성군 단밀면도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있는데 2014년 7월 1일 현재 994세대에 총 2,014명이 살고 있다.

세 성씨 중에서 손 씨는 본관지가 경주인 단 1세대가 남아 있으나(그러나 이 들이 15세기 단밀에 터를 잡았던 토박이 손 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나 씨는 한 가구도 없다.

 

위천 강가 지곡마을에 있는 나정 터

저곡(渚谷)마을의 나정 터

다만 위중2리 주미 마을은 아주 오래 전, 나씨가 개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위중1리 속칭 저곡마을에 나정승의 묘소(墓所) 가까운 곳에 세운 정자이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라는 나정(羅亭)이 있고, 용곡1리 속칭 도리비마을은 나정승(羅政丞) 즉 나천업(羅天業?)의 유허비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비를 돌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마을이름이 ‘돌이비(碑)’가 부르기 쉬운 ‘도리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런 몇 가지 구전을 종합해 볼 때 나씨는 단밀면의 동쪽 이 세 마을 일대에 정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본관이 어디인지 나정이나 유허비(遺墟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문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유허비마저 남아 있지 않고 나정승(羅政丞)이 <의성군지>에서 나천업(羅天業 ?)이라고 한 점이다.

나천업은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의 장인(丈人)으로 그 묘소가 의성군 점곡면 사촌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촌은 정승이 3명이 태어날 명당으로 신라시대 나천업, 조선 중기에 류성룡이 태어났고 나머지 1명이 언젠가 태어날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유허비, 나정, 묘소 등 나씨 관련 사적들의 이야기는 나 씨가 단밀의 토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증좌다. 그러나 금성, 나주, 안정, 수성, 군위 등 많은 나 씨 중 어느 나 씨의 누구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자료로 보아 첫째 비안출신으로 신라 말의 인물인 최치원의 장인 즉 나천업(羅千業)의 아버지인 나인(羅認)일 가능성이 높고 둘째는 안정 나씨의 시조로 고려 공민왕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내고 안정백(安定柏)에 봉해져 안계면 안정을 식읍으로 받은 나천서(羅天瑞)의 아우로 역시 정승을 지낸 상산백(商山柏) 나원서(羅元瑞)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상산백 나원서는 군위 나씨의 시조인 적라백(赤羅伯 : 군위의 옛 지명)에 봉해진 나문서(羅文瑞)의 형이기도 하다.

나정승은 나인(羅認?), 나원서(羅元瑞?)

 

나정승의 묘가 있었다고 전해 오는 곳

 

 

나인(羅認)을 첫 번째로 보는 이유는<교남지> 비안 편 총묘조(塚墓條)에 그의 묘가 ‘비안군 북쪽 15리 해망산(海望山)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해망산이라고 부르는 산은 없으나 나정승 묘가 있었다는 산이 남아 있으며, 비안에서 볼 때 단밀면의 용곡1리와 위중1·2리는 북쪽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나원서로 보는 이유는 그가 상산백으로 봉작(封爵)을 받았다는 점과 후손이 없다는 점이다.

‘유(有) 삼나(三羅)’하여 고려 말 이름 난 나씨 3형제가 모두 정승의 반열에 올랐는데 첫째가 안정 나씨의 시조 안정백 나천서이고 둘째가 상산백(商山,상주의 옛 이름), 나원서이며 셋째가 군위 나씨의 시조 적라백 나문서이다.

나정과 유허비가 있는 일대는 옛 상산고을이기도 하니 나원서는 이곳을 봉토로 받고 살다가 돌아가니 묘를 써 놓았을 수 있고 후손이 없으니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폐허로 변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나정과 나정승의 유허비 주인이 상산백 나원서라면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여말(麗末) 나라가 어수선 하자 뜻있는 선비들은 낙향을 하거나 두문동으로 들어간다. 이때 나씨 3형제의 맏이이자 안정나씨 시조인 나천서는 야은 길재와 아주 신 씨 단밀 입향조의 아들 퇴재(退齋) 신우(申祐)와 더불어 백의 숙제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몸을 숨긴다. 

 

도리비의 유래가 된 나정승의 유허비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 오는 길

 

 

 

<두문동서원지>에 의하면 길재와 신우는 항절반(抗節班)에, 나천서는 정절반(靖節班)에 위패가 모셔진 ‘두문동72현’들이다. 따라서 세분은 동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한 동지들이다.

야은이 은거한 금오산은 거리가 다소 멀지만 퇴재 신우와 안정백 나천서가 은거한 곳은 단밀의 관동과 안계의 안정으로 30여 리에 불과하다. 또한 이들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즉 신우는 길재 아내의 큰 아버지이고 나천서의손서(孫壻)는 길재의 손자인 점이 그렇다.

이 두 분 또는 상산백 나원서를 포함한 세분이 서로 오고가며 넓은 안계평야가 굽어보이는 산자수명한 위천 강가 나정(羅亭)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삭이며 소회를 나누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또한 퇴재의 묘소와 재사가 나정이 있는 위중 1리와 그리 멀지 않는 구천면 용사리에 있는데 공의 거처인 단밀의 주선2리를 놔두고 굳이 10여 리 떨어진 이곳 용사리에 장사를 지낸 것은 앞서 말한 두 사람의 인연(?)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군위나씨세보>에 의하면 나인(羅認)을 한때 군위 나씨의 시조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활동한 나말(羅末)과 군위 나씨 시조 나문서의 활동 시기는 여말 공민왕 때라 600여 년의 시차가 있어 이를 배제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정(羅亭)이 상산백 나원서의 소유라면 이들 나씨 3형제가 자연을 벗 삼아 노닐든 곳일 수 있고, 이와 더불어 야은이나 퇴재도 함께 어울렸을 수도 있다.

나정이 있던 지곡마을은 안정 30여리, 군위 50여리, 금오산과 70~80여리 떨어져 말을 타면 1~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