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 수원백씨(水原白氏)의 뿌리 화암서원

이정웅 2015. 1. 17. 11:48

 

 

대구 수원백씨(水原白氏)의 뿌리 화암서원

화암서원

1789년(정조 13) 대구시 달서구 장기동에 선정 백인관을 기리는 화암사로 지었다가 훼철 된 후

대구시 북구 노곡동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묘우 숭의사

강당

서재 박학재

동재 수덕재

인문지리지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 (1425, 세종 7)>의 대구군 (수성현, 하빈현, 해안현 제외) 편에는 대구의 토성(土姓)으로 하(夏), 서(徐), 배(裵), 백(白)씨가 등장한다.

이들이 대구의 토성으로 자리 잡은 내력을 보면 하(夏)씨는 중국 송(宋) 나라의 대도독(大都督) 하흠(夏欽)이 고려 인종(仁宗) 때 귀화하여 그의 아들 용(溶)이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져 본관(本貫)을 달성(達城)으로 받고 현재 건들바위 일대에 정착한 것에서 비롯되고, 서(徐)씨 역시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낸 서진(徐晋)이 달성군에 봉해져 본관을 달성으로 받고 현재 달성공원을 중심으로 세거했으며, 배씨는 고려 중엽 평장사를 지낸 배운용이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져 달성(達城)을 관향(貫鄕) 받았다. 그러나 개기(開基)한 곳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세 가문의 공통점은 각기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으로 봉해졌다는 점이다. 달성은 대구의 별호(別號)이니 만큼 대구를 대표하는 성씨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 공을 쌓은 군(君)에게는 봉토(封土)를 내려주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15세기 대구지역 최고의 지배계급이었다.

백씨(白氏) 역시 대구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관지를 어디로 쓰는 백씨 인지? 입향조 이름은 무엇인지? 혹 어떤 인물인지? 무슨 벼슬은 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대구향교에서 펴낸 신문 <대구향교, 2014, 11,1>서원탐방 제6회 ‘화암서원(華巖書院)’편을 통해 실마리가 잡기 시작했다. 신문에 의하면 북구 노곡동의 화암서원은 선정(禪亭) 백인관(白仁冠 1341~1421)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 달서구의 장기동에 화암사(華巖祠)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던 서원이라고 한다.

화암은 '송도를연모하는 마음이 바위처럼 변함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 대원군 집권기 훼철되었고 1921년 북구 노곡동 선생의 묘소(墓所)아래에 경선재(景禪齋)를 지었으나 이 역시 퇴락해 1997년 서원으로 승격시키고 6세손 노암(老庵) 백문련(白文連)과 13세손 금암(錦巖) 백용채(白龍采)를 배향한 곳이라고 했다. 낙성 운은 다음과 같다.

특별히 옮겨지어 낙성을 고하니, 特地營移告闕成)

산은 더욱 아름답고 물소리는 더욱 맑네. 山增佳氣水增聲

대밭에 바람이 부니 세속의 시끄러움 들리지 않고, 風來園竹塵紛絶

창가의 오동에 밝은 달이 뜨니 도의가 살아나네. 月霽窓梧道意生

백세에 강론하여 전함은 성현의 가르침이고 百世講傳賢聖訓

천추에 음덕이 도우니 자손이 번창 하리라. 千秋陰佑子孫榮

서늘한 집과 따뜻한 방이 다 맞게 갖추어졌으니 凉軒燠室俱稱制

잠긴 덕이 이로부터 환하게 다시 밝으리라 潛德從今煥復明

특히, 주향인 선정공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태어난 분으로 1368년(공민왕 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부전서(吏部典書,고려 시대, 6부의 하나로 문선(文選)과 훈봉(勳封)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 집현전, 대제학(大提學, 조선시대 정2품 벼슬)을 역임했다.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여말 나라가 문란해지자 부모를 모시고 본향(本鄕)인 수원의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을 모셨다.

태종이 공의 높은 학문과 훌륭한 인품을 애석하게 여겨 3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아니하고 한양과 더 멀리 떨어진 금오산으로 이주하여 야은과 나라 잃은 슬픔을 서로 위로하며 지내다가 다시 길지를 찾아 대구 노곡에 자리를 잡고 당호를 선정(禪亭)으로 내걸었으니 대체로 조용하고 한적한 의미를 취한 것이라고 한다. 1421년(세종 3) 운명하시니 향년 81세였다. 조정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의문의 15세기 대구 토성 백씨(白氏)는 수원인 선정공(禪亭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절의를 지킨 문신이자, 시기적으로 조선 초에 이미 대구에 자리 잡았고, 벼슬이 문형(文衡)을 총괄하는 대제학이었으니 입향조가 군(君)으로 봉해진 하, 서, 배씨에 비해 뒤질 바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