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단밀의 명소 도호정

이정웅 2015. 1. 4. 07:25

 

도호정이 있는 의성군 단밀면 용곡 1리 속칭 도리비 마을 1577년 (선조 10) 경 고령인 신원 개척했다.

도리비와 도호정 앞을 흐르는 위천

도호정 전경

도호정 팔경

호은 신복성 신도비

 

0, 도호정(道湖亭)

․소재지 : 의성군 단밀면 용곡리 산 11-5번지

․규 모 : 1934년(甲戌) 와가(瓦家) 중심

① 대지 : 대지 231㎡(70평)

② 건평 : 31.54㎡(9.54평)

③ 구조 : 한식 목구조, 민도리 5량가, 팔작지붕

④ 평면 : 정면 3칸, 측면 1.5칸

가운데 대청, 좌우 온돌방 각 1칸(합 2칸)

⑤ 담장 : 2010년 한식 토석혼축

1577년(선조 10년) 경 도호 마을을 창시한 신원(申源) 공이 그의 선고(先考)인 신한룡(申漢龍 : 初諱 濩) 공에게 자문을 구하여, 먼저 산수가 빼어난 위천(渭川) 언덕에 초가 정자를 지은 것이 도호정의 모태이다. 그러나 당시 정자의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437년 전이다. 신원(申源) 공이 64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신복성(申福誠) 공은 3년 상 시묘살이를 마치고 선친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이 정자에서 조석으로 망배를 드리며, 1618년(광해군 10년)에 위천의 소(沼)가 휘몰아치고 안계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경관 좋은 위천 언덕 위에 정자를 중건하고 ‘아버지가 업을 시작하고 아들이 이어서 일을 완성한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긍구긍당(肯構肯堂)’에서 글자를 따와 정자 이름을 ‘긍모정(肯慕亭)’이라고 지었다.

그 후 133년이 지나 불이 나고 퇴락 했으므로 1750년(영조 26년) 고령신씨 21세 신광진(申光璡 : 고령신씨 20세 성직(聖直) 공의 장자이나 무후(無後) 공이 긍모정의 터에 정자를 짓고 ‘도호정사(道湖精舍)’로 이름을 고쳤다.

이는 선조를 추모하는 뜻과 함께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한다는 ‘청심과욕(淸心寡慾)’으로 자기 수양에 더욱 힘을 쏟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권방(權訪) 공과 조호연(趙虎然) 공은 신광진의 추모정신과 자기수양, 또 도(道)와 물(湖)의 관련성에 대해 기문(記文)을 지었다.

도호정사는 357년 동안 초가집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그 유지 보수가 너무나 힘들어 거의 폐허화에 가까운 초가 정자를, 일제가 만주사변(1937)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의 혼과 재산을 모조리 착취해 가, 하루 3끼 멀건 죽으로도 연명하기 어려운 그 때에 우리 선조들은 조상의 얼과 효행을 기리는 대사업이란 전제 하에 일치단결하여 1934년(甲戌年) 기와집 도호정(道湖亭)으로 개축하는 환골탈태의 획기적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둥과 서까래를 새로 마련한 것이 아니고, 마침 50여 리 떨어진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新谷里)에 적당한 와가의 매물이 있어, 이를 매입하여 해체한 후 기둥․서까래․문짝․기와 등 일체를 사람의 힘으로 장자봉(長子峰 : 422m)을 넘어서 도리비까지 운반하여 이건(移建)하였다. 물론 고령신씨 종중이 중심이 되었으나 단밀면, 구천면, 단북면 등 이웃의 유림들도 모두 협력해 함께 기와집(瓦家) 도호정을 건립했다.

현판은 하얼빈 거주 고령신씨 25세 신달식(申達植 : 哈爾濱 達植 呈 甲戌 菊月 吉日로 적혀 있다.) 공이 증정했다. 기문(記文)은 고령신씨 25세 신영식(申榮植) 공의 요청으로 진양 정동철(晉陽 鄭東轍) 공이 지었다.

시멘와가 정자가 75년의 세월이 흘러 비가 새고 기둥이 퇴락해져 땜질 보수로 지탱할 수 없음을 공감하고, 도호정을 출입하는 유림들과 의논하여 2009~2010년 2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하였다.

군비 4,500만원과 고령신씨 종중 3천만 원 합계 7천5백만 원으로 기둥과 서까래를 깎아 단장하고, 부식한 서까래 10개를 교체하며, 토기와로 불국사 기와와 같은 종류의 고령기와로서 지붕과 담장, 출입문을 말끔히 개체하였다. 담장은 종전의 흙담장을 모두 헐고 그 자리에 한식 토석혼축으로 새로 쌓고, 출입문도 더 크고 높게 말끔히 개축했다.

도호정의 여러 시판(詩板) 가운데에는 단밀면의 8가지 빼어난 경치를 읊은 도호정 팔경(八景)이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도호어정(道湖漁艇) : 도호의 고깃배

⑵ 묵지연화(墨池蓮花) : 묵계 연못에 활짝 핀 연꽃

⑶ 봉산추월(鳳山秋月) : 봉산에 뜬 가을 달

⑷ 만경낙조(萬景落照) : 만경산의 석양

⑸ 위성조우(渭城朝雨) : 위성마을에 내리는 아침 비

⑹ 칠성모연(七星暮煙) : 칠성마을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⑺ 월봉귀운(月峰歸雲) : 월봉산을 감돌며 흘러가는 구름

⑻ 평사낙안(平沙落雁) : 위천 모래 벌에 내려앉는 기러기

○ 도호정 연보(年譜)

․1577년(선조 10년) : 신원(申源) 공이 선고(先考) 신한룡(申漢龍) 공의 자문을 구하여 함께 초가정자를 창건하다.

․1618년(광해군 10년): 신복성(申福誠) 공이 개축하여 긍모정(肯慕亭)으로 이름을 붙이다.

․1750년(영조 26년) : 신광진(申光璡) 공이 긍모정을 개축하고 도(道)와 물(湖)의 연관성을 강조하여 도호정사(道湖亭舍)로 이름을 고치다.

․1934년(일제 치하) : 초가 도호정사를 와가정자(瓦家亭子)로 이건 신축하고 도호정(道湖亭)으로 이름을 붙이다.

․2009년~2010년 : 토기와로 지붕을 전면 교체하고, 한식 토석혼축의 담장을 새로 쌓고 출입문도 교체하다.

․2011년 : 도호정 부속 재실, 2층 붉은벽돌 양옥을 신축하다. 

 

0, 신복성(申福誠)과 신도비(神道碑)

신복성(申福誠) 공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의성군 단밀면 용곡1리 도호정 옆 ‘호은공 신도비(湖隱公神道碑)’에 기록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 신도비는 1968년 신영식(申榮植) 공을 위시한 후손들이 세우고, 비문은 문소(聞韶) 김정모(金正模) 공이 썼다.

공은 1568년(선조 1년)에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태어나 숙부에게 출계, 도호로 양자 오셨다. 이름은 복성(福誠)이요, 자는 자경(子敬), 호는 호은(湖隱)이며, 관향은 고령(高靈)으로 시조로부터 14세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지조가 곧았으며 효심이 두터워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과거시험을 보지 않자 나라에서는 그의 증조부․조부․아버지가 출사하여 높은 관직을 역임했으므로 음직(蔭職)으로 종9품 장사랑(將仕郞)을 제수(除授) 받았다.

공의 나이 48세 때(1615년) 아버지가 타계하자 도호에서 10여 리 떨어진 단북면 월봉산(月峰山)에 모시고 여막을 지어 3년 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을 한 번도 찾지 않았고, 주야로 호곡을 하면서 그 슬픔에 못 이겨 피눈물을 흘려서 상석(床石)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삼년상을 마친 후에는 아버지가 지은 정자를 중건하여 ‘긍모정(肯慕亭)’으로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묘소를 바라보며 조석으로 망배를 하였다.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고을의 수령이 전해 듣고 대단한 효자라고 하면서 당시 행정관청인 상주목에서 《상주읍지》에 기록토록 하였고, 또《고령신씨문헌통고》에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문장이 걸출한 뛰어난 선비인 류수암(柳修巖)․조초은(趙樵隱)․김동리(金東籬)․손허재(孫虛齋)․구소리(丘素履) 등 제공(諸公)이 시묘살이를 하는 월봉산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찾아가 그의 효행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

공은 1628년(인조 6년)에 61세로 세상을 떠나니 도호로부터 약 40 리 떨어진 군위군 소보면 보현리 청화산(靑華山) 동쪽기슭(해발 500m 지점)에 내외분 순흥안씨(順興安氏)와 합영(合塋)으로 모셔져 있다.

 

글 : 전 대구화원여고 교장 신천호

사진 : 이정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