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서상돈 선생 송덕비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이정웅 2015. 9. 17. 16:49

 

1902주민들이 세운 서상돈송덕비 비(碑)라기보다는 자연석에 새긴 각석(刻石)이라고 할 수 있다.

송덕비원경

송덕비 주변의 다른 비석들

 

서상돈 선생 송덕비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2013년 칠곡향교의 명륜당 뒤에서 서상돈 선생의 송덕비를 발견하고 그 것을 매일신문이 보도하므로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웃도 외면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경쟁사 기자로부터 왜 우리 신문에 제보하지 않았느냐는 등 질책을 받고 또 다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아 그 소회를 불로그에 올렸다. 얼마 후 심충성이라는 분으로부터 군위에 한 기(基)가 더 있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어느 날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갔다가 김영균 처장을 만났더니 송덕비를 발견한 공로로 포상을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녹조와 홍조 두 개의 훈장을 받은 전력이 있는 나에게 표창 따위가 무슨 대수이랴 하며 다만 송덕비가 모처에 하나 더 있다고 했더니 꼭 한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

일이 있어 미루다가 9월이 되어 군위군청의 변외숙 계장에게 전화를 했다. 서상돈선생의 송덕비가 군위에 있다고 하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대학원 후배인 그는 모범적인 공직자이자 그곳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르겠다고 하드라는 것이었다. 군세가 큰 고장도 아니고 변 계장의 능력으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예상이 빗나갔다. 앞이 캄캄했다. 현장을 보여 주겠다고 큰 소리쳐 놓고 못 찾으면 무슨 망신이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댓글을 단 심충성씨의 불로그에 들어가 전화번호를 찾아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았다.

다시 그의 블로그를 뒤졌더니 소보면 위성리 154-1라는 주소와 현장 사진이 나왔다. 기쁜 나머지 휴일도 아랑곳없이 변 계장과 김 처장에게 전화를 했다. 변 계장에게는 위치를 찾았으며 더 이상 노력 할 필요가 없다고 알리고, 김 처장에게는 내주(來週) 날짜를 잡아 현장을 가자고 했다. 그리곤 불로그의 사진을 복사해 구본욱 박사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9월 15일에 가자는 김 처장의 답신이 왔다. 변 계장으로부터도 다시 전화가 왔다. 선배님이 가르쳐 준 곳을 가봤으나 없다는 것이다. 일요일인데도 쉬지도 않고 현장을 찾았던 모양이다. 아뿔사 내가 자세히 설명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여느 비와 달리 글씨가 바위에 새겼으며 폐가(廢家)의 담장 안에 있어 문을 따고 들어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데 그 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알려 주고 9월 15일 14시경 현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 날 구박사로부터 번역문도 왔다.

대구 서주사 상돈 송덕비(大邱 徐主事 相燉 頌德碑)

휼아립아(恤我粒我), 곡식으로 우리를 구휼하사

인출범금(仁出凡今), 인(仁)을 지금 베풀어 섰네.

만구일편(万口一片), 만인의 칭송을 한 조각 돌에 새기니

한미륵금(恨未勒金), 쇠에 새기지 못함이 한이 되네.

1902년에 세워졌으며 주사(主事)는 고종 때의 관직이라고 했다. 1894년부터 1902년까지 세금을 징수하는 시찰사(視察使)를 역임했으니 주사는 시찰사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다.

약속한 날 김 처장과 국채보상운동기념회 관계자 두 분과 함께 현장으로 출발하면서 변 계장에게 다시 전화를 했더니 주변에 풀이 많아 잘 보이도록 정리해 놓았다고 해서 고맙다고 했다. 차중은 조금 서먹했다. 서상돈 선생에 대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하며 그동안 현장을 찾기 위해 노력한데 비해 기념사업회에 관계하는 분들의 반응은 그리 기뻐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시간여를 달려 현장에 도착하니 변 계장과 서성호 면장이 나와 있었다.

최초로 발견한 심충성씨는 통화가 안 돼 그의 불로그에 함께 현장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더니 근무 중이라 불가하니 잘 보고 오라는 댓글만 남겼다.

사진을 찍고 곧 현장을 떴다. 우여곡절 끝에 현장을 찾아낸 나는 물론 자기 소관업무도 아닌 일로 휴일도 쉬지 못하고 협조한 변 계장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는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의 처사에 서운함마저 들었다.

송덕비가 있는 위성리는 고로면에서 발원하여 상주시 중동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위천(渭川)의 상류로 한때 소금배가 올라왔던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이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해 사업을 할 때 화원의 사문진 나루터와 함께 이곳도 그 중 한곳이고 가뭄 등 재해로 주민들의 삶이 힘 들자 도움을 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