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이낭의 묘비
오누이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의자이낭묘(義姉李娘墓)
가창면 냉천리 산 14-4번지에 의자(義姉) 이낭(李娘)의 묘가 있다. 가창에서 청도로 가는 국도확장공사 이전에는 산5-4번지에 있었으나 국도를 확장하면서 2002년 5월 30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곳에는 12살의 어린 누나가 자기는 죽으면서도 젖먹이 남동생을 화재로부터 구해 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 이낭이 묻혀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냉천 마을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12살 난 딸과 젖먹이를 두고 살았다. 남편은 전염성이 강한 병을 앓고 있어 집을 나와 격리된 외딴곳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끼니때가 되면 부인이 그에게 밥을 가져다주었다. 여느 날과 같이 남편에게 밥을 가지고 간 사이에 집에서 불이 났다.
당황한 누이는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배아래 깔고 그 위에 엎어져 불길이 닿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찾아온 부부가 아이들의 생사가 궁금했다. 큰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방안을 뒤졌다. 한구석에 딸아이의 타다만 시체가 나오고 그 밑에 젖먹이가 기절한 채 누워 있었다. 밖으로 옮겨 주무르자 깨어났다. 누나의 갸륵한 희생이 대를 이를 남동생을 살린 것이다. 이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웃은 물론 고을의 수령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대구 판관 조종순(趙鐘淳)이 의로운 누나를 기리기 위해 묘를 만들고 빗돌을 세우니 지금의 의자이낭지묘(義姉李娘之墓)로 조 판관의 추도 시는 다음과 같다.
12살, 어린 나이로 감라기령(甘羅其齡)
섭앵(攝嫈)의 지조를 실천하였네. 섭앵내지(聶嫈內志)
동생 대신 죽은 것은 대제이사(代弟而死)
부모의 후사를 잇기 위함이라네. 위친지사(爲親之嗣)
첫 번째 연(聯)의 감라(甘羅)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 사람인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呂不韋)의 가신(家臣)이었다. 일찍이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 때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나라를 설득하여 다섯 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한 인물로 12살을 뜻하며 둘째 연의 섭앵(聶嫈)은 섭정(攝政)의 누이로 역시 전국 시대 한(韓)의 자객(刺客) 섭정이 한경(韓卿)인 엄중자(嚴仲子)를 위하여 한(韓)의 승상 협루(俠累)를 죽이고 자신도 얼굴 가죽을 벗겨 자살하니,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누이가 그 말을 듣고는 “우리 아우가 지극히 어지니, 내 몸을 아끼어 그 이름을 없앨 수 없다.” 하고, 곧 가서 시체를 안고 울며 “나의 아우 섭정이다.” 하고, 자신도 시체 옆에서 자살하였다는 즉 아우를 위해 죽은 누이 섭앵(攝嫈)과 같다는 말이다.
비 뒷면의 갑자년 3월 3일 가창면 중수(重竪)는 처음 있던 비가 마모되자 1824년 갑자년에 판관 조종순의 주관으로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종순(趙鍾淳)은 본관이 양주(楊州)로 아버지는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조진순(趙鎭順)이며 1777년(정조 1) 서울에서 태어났다. 25세 때 즉 1801년(순조 1) 진사시에 합격하여 1824년(순조 24) 12월 옥천 군수로 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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