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골 전경
사육신과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 박중림을 기리는 육신사
임란 때 일부가 불타 새로 중건한 태고정, 현판 태고정은 한석봉, 일시루는 안평대군의 글씨다.(보물 제554호)
삼가헌(三可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인가답야, 중요불가능야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즉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
드라마 '토지'를 촬영했을 만큼 아름다운 정자 하엽정
충절의 고장 묘골 이야기
들어가는 말
달성군 하빈면 묘골은 사육신의 한 분으로 유일하게 혈손(血孫)을 보전한 충정공 박팽년(1417~1456)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집성촌이다. 일명 묘골박씨라고 한다.
시조는 영규(英規)로 후백제 견훤의 사위이면서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승(左丞)에 올랐다.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숙정(淑貞)을 일세조(一世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 명문이다.
충정공은 충남 회덕(현,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대사헌, 공·형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박중림(朴仲林)과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4년(세종 16) 18세 약관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뽑혔으며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아버지 박중림과 동생 인년, 기년, 대년, 영년, 아들 헌·순·분 등 삼대 9명이 참화를 입은 분이다.
1691년(숙종 17) 관작이 회복되고,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영월 장릉(莊陵, 단종의 능)의 충신단(忠臣壇), 대구의 육신사 등에 제향 되었다.
충정공이 후손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아들 박순이 묘골에 사는 교동현(喬桐縣, 현, 강화군 교동면, 서도면, 삼산면 일부) 현감을 지낸 이철근(李鐵根)의 딸 성주이씨와 혼인함으로 비롯되었다. 친정이 묘골인 이씨는 친정 가까운 대구로 자원해 관비(官婢)로 와 있었다. 이 때 이미 임신 중이었고 때 마침 해산을 하니 아들을 낳았다. 공교롭게도 친정집의 여종 역시 딸을 낳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역적의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몰수당해야 했다.
이 때 두 사람은 아이를 바꾸어 길렀다. 그러나 역적의 손자인 만큼 드러내놓고 키울 수는 없었다. 이름도 짓지 못하고 박씨 성을 가진 종이라 하여 박비(朴婢)로만 불렀다.
그 후 박비가 청년이 되었을 때 이모부인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관찰사(재임기간 1493~1494)로 왔다. 그는 묘골을 찾아와 박비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수 있느냐’고 하며 자수시켰다.
성종은 그를 용서하고 충신의 자손이라며 오히려 칭찬하면서 이름 일산(壹珊, 사육신 중에 오직 하나 남은 혈육이라는 의미라고 한다)을 하사하고, 사복시정(司僕侍正, 궁중의 말과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수장)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이곳 묘골에 터를 잡으며 산 것이 어언 550 여년에 이른다.
묘골의 풍수
풍수학자 이몽일 박사는 묘골에 대해서. “영남 땅에는 명기(名基)가 많다. 고을 터, 절터, 집터, 묘 터를 망라하면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많은 명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 영남일 듯 싶다. 그 숱한 명기 중에서도 실로 묘한 풍수 이력(履歷)을 쌓아오고 있는 곳 이 있다.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竗谷 혹은 妙洞)이 바로 그곳이다. 만약 영남 땅에서 풍수 때문에 태어났고, 풍수로써 가꾸어져 왔으며, 풍수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마을을 들라면 필자는 단연 묘골을 꼽는다. 비단 '낙동강 가에 있으면서도 강이 보이지 않고, 들판을 끼고 있으면서도 들판이 보이지 않는', 그런 묘한 지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 터는 알고 보면 조기(肇基:터를 엶)에서부터 작금의 토지이용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풍수와 연(緣)을 끊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풍수 명소 중의 명소다. 일개 보신지(保身地)에서 한 가문의 세거지 명당으로, 또한 지금은 육신사(六臣祠)가 있는 역사적인 명소와 전원주택지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그 변화상을 보노라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적인 대하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다.-----보다 흥미로운 점은 성주고을 친정 가까운 곳에서도 숨어 살만한 보신의 터로 어떻게 그토록 절묘한 묘골을 고를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터 자체가 지닌 천연적인 궁벽성과 폐쇄성, 그리고 용산(龍山) 오른쪽 능선 너머로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음직하다.
그 터의 본색을 아는 데는 사실 세간에 전해오는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 명당설보다는 파자형(巴字形) 지세설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전자는 묘골의 진산(鎭山:마을을 수호해주는 산)으로 팔공산을 끌어들인다. 팔공산 연맥이 가산(架山)에서 소학산(巢鶴 山)으로 이어진 후, 거기에서 한 지맥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장원봉(壯 元峰)-거무산(巨巫山 혹은 錦舞山)-용산(龍山)-구봉산(九峰山)으로 이어져 낙동강과 만나는데, 묘골이 들어앉은 용산 자락은 마치 팔공산을 머리로 하는 거대한 용이 자신의 꼬리를 돌아보는 듯한, 이른바 회룡고미형의 대 명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묘골의 비좁은 판국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거창한 풍수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묘골 터에 대한 그 같은 거시적이면서도 내맥(來脈)적인 풍수설의 등장은 아마도 그 터를 세거지로 삼은 순천(혹은 묘골)박씨 가문이 후일 크게 발흥한 것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 직 하다.
그에 비해 파자형 지세설은 보다 미시적이고 가시적이다. 묘골의 안산 너머에 파회(巴回)라는 마을이 있다. 묘골박씨 가문이 흥하면서 후일 세거 지가 확대돼 생겨난 마을인데, 모르는 사람은 마치 안동 하회(河回)마을처럼 물줄기가 굽이도는 마을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파회는 산줄기가 마치 파(巴)자 모양으로 감싸 돌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글자의 음이 똑같은 파회(坡回)라는 이름이나 돌골(回谷)마을 같은 이름이 같이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 같은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고 보면 파자를 실제 지세에 대응시킬 경우, 윗부분 오른쪽 네모 안은 묘골이고, 왼쪽 네모 안은 파회인 셈이다. 아닌게아니라 현장에서 묘골 일대의 지세를 동에서 서로 조망해 볼 것 같으면 영락없이 그 글자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경우 출입구는 오로지 한 군데, 동 남쪽으로 트인 부분뿐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개방된 곳이 바로 그 구석진 한 곳 뿐이라면 그런 터가 지닌 특성이란 것은 뻔하지 않겠는가. 밖에서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쉬 눈치 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맘대로 밖을 내다볼 수 없다. 그 점이 곧 묘골 터의 본 색이자, 그곳이 처음에는 은거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인식됐던 주된 이유인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이 박사의 풍수설과 달리 이곳 순천박씨 문중에서는 파(巴)자를 뒤집어 놓은 형국이라 파회(巴回)라고 했으며, 또 도로 개설로 구봉산의 맥이 끊어지기 전 앞산에서 올려다보면 여러 산들이 겹겹이 둘러 싸여 파회(坡回)라 했다고 한다.
어떻던 명당이기에 후손이 번창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으로 자리매김 되어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몸을 던져 지키고, 학문으로 이웃을 교화시켜 명문(名門)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묘골의 인물
순천박문은 충신의 후예답게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니 대표적인 몇 분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0, 박충후(朴忠後, 1552~1611)
충정공의 5대손으로 음사로 함창 현감으로 나아가 치적이 많았고, 1594년(선조 27)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도원수(都元帥) 권율, 초유사 김성일과 더불어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많은 적을 포획했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사신 서관란, 진효, 정응태, 양조령 등이 남하하자 이들을 접대하고 쌀과 콩을 내어 장졸들에게도 나누어주니 사신들이 감탄하였고,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했다. 우배선, 전계신 등과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一等)에 녹훈되었다.
0, 박충윤(朴忠允 1557~1638)
충정공의 5대손으로 1586년(선조 19) 통훈대부 제용감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맏형 충후와 함께 창의하여 공을 세우니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하북(河北) 대장으로 임명했다. 1597년 명나라 장수들을 따라 울산에서 적을 토벌하고 곽재우와 화왕산성을 지키고, 여러 의병장들과 공산회맹에 참여했다. 난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으로 삼등(三等)에 녹훈되었다. 팔공산 전투에서 채몽연 등 58인과 함께 화답시를 남긴 것이 이눌(李訥)의 시문집인 <낙의재 유집(樂義齋 遺集)>에 실려 있다. 사후 통정대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0, 박충서(朴忠緖, 1562~1624)
충정공의 5대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 훈련원 판관(判官) 재임 시 임란이 발발하자 하빈 고을에 침범한 왜적을 격퇴했다. 하빈 묘리의 사육신 묘우(廟宇)를 수호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많은 적을 포획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삼등(三等)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위원종공신 일등(一等)에 녹훈되었다. 뒤에 임란과 이괄의 난의 공훈으로 정헌대부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0, 박종우(朴宗祐, 1587∼1654).
충정공의 6대손으로 아호는 도곡(陶谷), 하빈조수(河濱釣叟). 아버지는 제용감주부 충윤(忠胤)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첨정(僉正) 광복(光復)의 딸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싸움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90세 된 양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랑캐를 물리칠 열 가지 대책을 감사 심연(沈演)에게 진술하였다. 1637년(인조 15) 인조가 굴복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북향통곡하고, 평생 동안 지어 모은 초고(草稿)를 태워버렸다.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하고 종신토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달성10현(達城十賢) 중의 한 사람이며 문음(文蔭)으로 부사과(副司果)가 되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도곡문집(陶谷文集)>과 편저인<병자록(丙子錄)>이 있다.
0, 박숭고(朴崇古, 1615~1671)
충정공의 7대손으로 자는 태소(太素)이다. 1645년(인조 23)에 벼슬길에 나아가 세마(洗馬) 익찬(翊贊)을 거쳐 4군의 수령을 지냈다. 세자궁에 있을 때 좋은 말과 착한 행실로 동궁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하여 세자로부터 공경하고 소중한 여김을 받았다.
군수가 되어서는 백성의 복리에 힘썼으며 교육과 정치를 잘하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공적커서 상으로 말(馬)을 받았다. 허목, 김상헌, 이식 등의 고증과 자문을 받아 사육신의 묘 4기를 찾고, 허목에게 기문을 짓게 하여 1642년(인조 20)묘역을 정비하고 1645년에는 비석을 세웠다.
0, 박경여(朴慶餘 1651~1715)
충정공의 9대손으로 숭고의 손자이다 숙종 때 청안 현감으로 권화(權和) 등과 구 노릉지를 고증하고 새로운 사적을 모아 편집해 1711년(숙종 37)에 <장릉지(莊陵誌)>를 간행했다.
이 장릉지는 ‘세조가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자, 노산군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박경여 등이 편찬한 <장릉지>에는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 향교의 심부름꾼)이 활 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으며 옥체를 청령포(淸泠浦)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고 하여 <세조실록>의 기사가 세조에 아부하던 사관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 날조했다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가 있게 하고 있다.
0, 박성수(朴聖洙1735~1810)
충정공의 11대 손으로 아호는 삼가헌(三可軒)이다. 풍모가 수려하고, 용기가 탁월하며, 학문이 높고, 특히 경세에 해박하고 서책(書冊)을 많이 보유했다고 한다. 첨중추(僉中樞)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골 본가에서 이곳 파회(坡回)를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시도 짓고 담소하는 공간으로 1769년(영조 45)에 터를 닦아 별서로 초가삼간을 지었다. 저서로 <고금인감(古今人鑑)>이 있다.
0, 박광석(朴光錫, 1764~1845)
충정공의 12대 손이다. 아호는 노포(老圃)이다. 할아버지는 박명리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박성수이며 어머니는 부림홍씨로 홍필구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문과에 급제했다. 1805년(순조 5)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사헌부 감찰 남포현감 등을 지내다가 그 뒤 부교리, 도부승지, 안변 부사를 역임했다.
한성부 우윤을 비롯하여 부총관동지의금부경연특진관을 지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남포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과중한 선세(船稅)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조정에 건의하여 이를 감면하고, 안변 부사로 있을 때에는 송사를 바르게 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1819년(순조19) 채제공의 신원을 주장했다. 82세로 죽자 왕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저서로 <노포문집>이 있다. 아버지가 별서로 쓰던 삼가헌을 물려받아 1826년(순조 26) 초가를 헐고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초가로 이어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0, 박기정(朴基正, 1748~?)
충정공의 13대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아호는 벽오(碧梧)이다. 할아버지는 성원(聖源)이고, 아버지는 광주(光胄)이며, 어머니는 정운채(鄭運采)의 딸이다.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다가, 1784년(정조 8)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영월부사·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같은 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태조가 말달리기를 하던 곡산(谷山)의 치마도(馳馬道) 옛터를 고증하여 많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1796년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莊陵志)>를 교정하여 <장릉사보(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정조로부터 사육신의 후예라는 이유로 총애를 받아 영월부사와 참판 등에 특별히 제수 받는 영광을 누렸다.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장릉영천비(莊陵靈泉碑), 관풍헌중수기(觀風軒重修記),육신사기(六臣祠記) 등의 글씨가 전한다.
0, 박문현(朴文鉉, 1798~1858)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경숙(敬叔)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별검(別檢) 박성준(朴聖俊)이고, 조부는 박광호(朴光昊)이며, 부친은 박기녕(朴基寧)이다. 외조부는 윤치정(尹致禎)이고, 처부는 권인호(權仁祜)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시에서 병과 10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원 정언‧홍문관 부수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 육조(六條)의 진면소(陳勉疏)를 올렸을 때, 왕이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1852년(철종 3)에 사헌부 집의를 역임할 때 양사(兩司)의 인물인 대사헌 오취선(吳取善)과 대사간 박종휴(朴宗休) 등과 함께 상소하여 유배 중이던 이응식(李應植) 등의 유배처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는 왕의 명령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가 체차(遞差)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순조대왕추상존호대왕대비전가상존호도감의궤(純祖大王追上尊號大王大妃殿加上尊號都監儀軌)>를 편찬할 때 성균관 사성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859년(철종 10)에 안악군수로 재임하던 중 사헌부집의 정재영(丁載榮)이 올린 소장에 이름이 들어가 벼슬을 잃기도 하였다.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0, 박두을(朴杜乙, 1907~2000)
삼성창업주 이병철의 부인이자 현 삼성 그룹 총수 이건희 회장의 어미니 박두을 여사는 이곳 묘골에서 아버지 박기동의 4녀로 태어났다. 박팽년의 후손답게 선비였던 아버지와 '교동댁'으로 불렸던 어머니 손에서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얼굴이 예쁘고 인심이 좋아 평소 '두리'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15세 되던 무렵 어느 날 절에서 시주를 나온 한 스님으로부터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26년 20세에 세 살 연하인 이병철과 결혼하여 3남 5녀를 두었다.
훗날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박(朴)여사를 두고 ‘처음 본 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다. 슬하에 4남 5녀를 두고 반세기여를 서로 도우면서 살아왔다. 내자 역시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배우고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사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치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처럼 수신제가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 내자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맏아들 이맹희씨는 그의 회상록에서 “아버지 집안이 의령 일대에서는 부자라고 했지만 굳이 비교해보자면 당시 경북 달성군에 있었던 외가 쪽이 더 부농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수가 없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 집안 어른들에 따르면 친가 쪽도 물론 3000석 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를 지닌 집안이었고 서원을 세울 정도의 성리학자셨지만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실제 어머니는 시집 올 적에도 몸종을 비롯하여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고 했다고 해 결혼 당시 묘골 친정의 재산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0, 박병규(朴秉圭, 1925~1994)
아호는 효남(曉嵐), 서예가로 부인은 청주 정씨로 한강 정구의 후손이다. 충청공의 18세 손 황(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예가의 길로 들어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3회에 걸쳐 특선했다.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전작가, 초대작가와 한국서예협회 부회장, 국제서도협회 한국본부 이사, 청구묵림회 회장, 국전심사위원을 지냈다.
영주 부석사의 ‘해동화엄종찰’, ‘태백산 부석사’, 인흥마을의 ‘인수문고’ 청도 ‘운강고택’ 송효찬 장군의 ‘묘비’ 등이 그의 작품이며 유작(遺作) 40여 점은성균관대학교에 기증되었다. 행초서로 일가를 이루었다,
0, 박준규(朴浚圭,1925~2014)
정치인으로 아호는 송산(松山)이다.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민주당의 공천으로 고향 경북 달성군에서 두 차례 출마했다가 모두 낙선하는 비운을 맛보았고, 2전 3기 끝에 5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5대 국회에서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소장파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이 후 엄민영의 추천으로 민주공화당에 영입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로 지역구를 옮긴 뒤 3선의 고지에 올랐고, 8대 총선에서 신민당의 정운갑에 패해 낙선한 뒤 그해 12월에 치러진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대구에서 6선을 더 기록한다.
제5공화국에서는 3김과 함께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서 출마하지 못했으나,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13대 국회의장을 지냈고 1992년 14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직에 유임되나 1993년 문민정부의 재산공개 파동 당시 민자당 지도부로부터 국회의원직 사퇴를 종용받았으나 반발하여 탈당하고 의장직은 사임하였다.
1995년에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긴 뒤 1998년에 DJP공동정부의 수혜를 받아 국회의장 3선 고지에 올랐다.
같은 달성출신인 이효상, 김성곤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끌었다.
묘골의 문화재
0, 태고정(보물 제554호)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그러나 임란의 피해는 이곳도 피해갈 수 없어 선조 25년(1592) 왜적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많은 비가 쏟아져 저절로 꺼지자 그들이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후손 박충후가 1596년(선조 29) 다시 짓고 그 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정호 태고장(太古亭)은 조선의 명필 석봉 한호(韓濩)가, 편액 일시루(一是樓)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글이라고 한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태고정이 완성되기 26년 전 계유정난 시 사사된 것을 감안하면 평소 안평대군과 교분이 두터웠던 할아버지 충정공의 유품(遺品)이 아닐까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체찰사로 온 윤두수의 시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라고 한다.
0, 삼가헌 (중요 민속문화재 제104호)
삼가헌은 묘골과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박팽년 선생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영조 45)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정조 7)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순조 20)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대문 밖에는 탱자나무와 굴참나무를 심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삼가헌을 지을 당시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고종 11)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可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인가답야, 중요불가능야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즉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지(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용(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삼가헌의 부속 정원인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조선시대 전통정원으로 드라마 ‘토지’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연지에 정자를 지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군자정(君子亭)이라고도 하고, 또는 연정(蓮亭)이라고 한다. 전자는 연꽃이 군자처럼 고고한 꽃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연꽃이 있는 곳의 정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정자 이름은 하엽(荷葉) 즉 연잎을 주제로 붙였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안채는 전면 6칸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영남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사랑채에 있는 당호 삼가헌(三可軒)의 현판은 호남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悌忠信)라고 쓰인 현판은 기호남인(畿湖南人)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글이다. 후손 박도덕이 이곳을 지키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0,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제 제32호)
도곡재(陶谷齋)는 1778년(정조 2)에 대사성이었던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1800년(정조 24) 경에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남부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현재 후손 박종혁이 지키고 있다. 오래 동안 교직에 몸담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그는 꽃가꾸기에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사시사철 꽃이 피도록 정원을 꾸며 방문객을 즐겁게 하고 있어 묘골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게 했다.
맺는말
박일산은 1479년(성종 10) 이곳에 99칸의 건물을 짓고 개기(開基)했다고 한다. 태고정의 북쪽에 절의묘가 있었고, 2층의 기각루와 피서루와 더불어, 부용란, 복도, 점화루, 장서각, 대청, 창옥, 응방루 등의 건물이 있었고, 남쪽으로 홍전문과 이문 등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절도사(종2품) 이하는 말에서 내려서 방문하도록 했다고 한다.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했던 그가 당대에 이만한 큰 규모의 저택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외가 성주 이씨의 후원이 컸다고 한다.
마을 맨 위에 자리 잡은 육신사는 비록 건축연대는 일천하나 묘골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전신은 절의묘(節義廟)로 충정공의 위패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어느 기일(忌日) 현손 계창의 꿈에 사당 밖에서 여섯 분이 서성거리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묘호를 낙빈사(洛濱祠)로 고쳐 다섯 분의 제물을 차려 여섯 분을 함께 모셨다.
그 후 낙빈사는 낙빈서원으로 승격 되고 1691년((숙종 17) 서원의 별모(別廟)에서 제사를 지내왔으며 1694년(숙종 20) 사액 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대원군이 전국의 많은 서원을 훼철할 때 이곳 낙빈서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대원군의 훼철정책 즉 일인일사(一人一祠), 한 사람은 한 사당에만 모신다는 원칙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서울 노량진에 낙빈서원보다 앞서 1681년(숙종 7)에 세운 사육신을 모시는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람들에 대한 두 개의 서원을 둘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 유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인 1924년 다시 복원 되었고 그 후 1975년 육신사를 새로 지으면서 사호(祠號)를 숭정사(崇正祠)라 하여 박팽년을 비롯해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사육신 여섯 분과 충정공의 아버지 박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외에도 묘골에는 삼충각(三忠閣)이 있다. 1775년(영조 5) 영조 때 정려된 충정공 박팽년과 1831(순조 31) 순조 때 정려된 그의 아들 순(珣)과 손자 일산 3세를 기리는 곳이다.
이 삼충각은 경상 감사 김양순(金陽淳, 1776~1840)과 후임 관찰사 서희순(徐熹淳, 1793~1857) 관찰사가 도내 71개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경비를 갹출(醵出)하여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는 극히 예외적인일이다. 비명은 순천박씨3세정충기실비(順天朴氏三世記實碑)로 비문은 홍문관 교리(校理) 박승현(朴升鉉)이 지었다.
묘골은 한 때 7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으나 이곳도 산업화에 따른 변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현재는 30 여 호가 마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후손들이 가전충효 (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 즉 ‘가정에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법도를 이어가고, 사회에서는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한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종훈을 가슴에 새기고 정계, 관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라와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달성군 부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마감한 박노황도 후손으로 묘골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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