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사 적멸보궁 내의 단풍나무
912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한 용연사 극락전
인악대사 진영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61호)
부처님의 진신사라를 모신 석조계단 (보물 제539호)
적멸보궁
인악대사 부도
조선후기의 고승 인악대사와 용연사 적멸보궁의 단풍나무
912년(신덕왕 1) 보양국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 용연사는 어느 절보다 주변의 숲이 잘 보전되었다. 따라서 봄의 신록이나 여름의 무성한 숲, 가을의 울긋불긋한 단풍 등 4계절 언제 찾아도 아름답다. 그리고 명적암의 수령 300여 년의 돌배나무(보호수 8-66)를 비롯해, 극락전 앞마당의 큰 느티나무, 적멸보궁 내의 측백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 특이한 나무들도 있다.
극락전 앞의 느티나무는 우선 크고 굵을 뿐 아니라, 계곡과 하늘을 향한 가지들이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휘둘려 자라는 모습이 경이롭고, 적멸보궁 앞의 측백나무는 수관(樹冠)의 생장점이 꺾여 있고, 줄기에 누가 일부러 끌로 판 듯이 갈라져 있는 것이 스스로 아물며 자라는 모습이 경이롭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흡사 벼락 맞은 나무 같다. 또한 옛 향교나 서원 등 선비들이 공부하는 공간에 심어지는 은행나무가 있는 것도 이채롭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나무는 담장 밖 비탈면의 단풍나무다.
악조건을 극복하고 무수한 가지를 뻗어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모습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용연사는 동화사의 많은 말사(末寺)의 한 절이기는 하나 여느 말사와 다른 특별한 가람이기도 하다.
첫째는 계통이 확실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절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학승(學僧) 인악대사의 출가와 입적(入寂)한 절이라는 점이다.
용연사는 사찰 내 가장 중심공간이 극락전이나 거의 대다수 절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진 곳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등을 일러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들 절은 석고나 나무, 돌, 철 등으로 만든 부처님 상을 모신 다른 절보다 사격(寺格)이 높다.
이런 까닭으로 많은 절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싶어 한다. 최근에 짓는 절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인연이 있는 인도나 스리랑카 등에서 새로 모셔오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 처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절은 양산 통도사이다. 용연사는 이 통도사의 진신사리 4과 중 1과를 봉안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절인가.
통도사 <사적기>에 의하면 643년(선덕여왕 12)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두골(佛頭骨), 치아(佛齒) 등 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법보사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한다.
용연사의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뒤 금강계단(보물 제539호)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1676년(숙종 2) 사헌부 지평 권해(權瑎)가 짓고 완산인 전렴(全濂)이 쓴 석가여래비문(釋迦如來碑文)에 자세한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사리는 모두 2 함인데 각각 2과(顆)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 왜적이 도굴해 가져가려고 한 것을 송운대사 유정(惟政) 즉 사명당(四溟堂)이 도로 찾았다.
전란 중이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상의했더니 1함은 제자 선화(禪和)에게 다른 1 함는 사명당에게 도로 주었다. 그러나 선조의 명으로 일본 사신으로 가게 되어 치악산 각림사에 두었다. 이 후 스님의 제자 청진(淸振)이 용연사로 가져왔다. 1673년(현종 14) 여러 대중들과 논의하여 1과는 통도사로 보내고 나머지 1과는 금강계단에 묻어 오늘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만 비슬산 용연사는 삼보사찰의 하나인 통도사에 버금간다.
경내에는 이 절에서 머리를 깎고 34년 간 승려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부속 명적암에서 입적하신 인악대사의 부도가 있다. 스님은 속성이 이씨로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인악(仁嶽)은 법명이고 속명은 의첨(義沾)이다. 1746년(영조 22) 화원 본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 8살에 소학을 외웠으며 15세에 주역의 깊은 뜻을 헤아렸으며 문장 또한 뛰어나 고을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18살 때 이 절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님들의 엄숙함을 보고 문득 마음에 감동을 느껴 출가하여 벽봉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으니 이 때 스님은 22세였다.
그 후 화엄종장 상언으로부터 화엄경의 진리를 터득하고 심오한 이치를 깨달았다. 비슬산, 황악산, 계룡산 등에서 강석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다가 동화사로 돌아왔다.
1790년(정조 14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여 불상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름 난 스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니 스님이 뽑혔다. 이때 <용주사부처님 복장에 봉안 하는 글(용주사불복장봉안문)>과 <용주사 신장에게 제사 드리는 글(용주사제신장문)>을 지으니 정조가 감탄한 나머지 “스님 중에서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고 칭찬하며 홍제(弘濟)라는 시호를 내렸다.
1796년(정조 20)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세수 51세, 법랍 34세였다. 저서로 <화엄사기>, <원각사기>, <기신론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유학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교유가 있어 스님을 일러 ‘ 유생인지 스님인지 모를 정도’라고 했다고 한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도교까지 융합할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유불 이교회통(離敎會通)을 추구했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동화사를 찾아와 스님을 흠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님 오심은 한가로운 구름 무심히 피어남 / 스님 가심은 외로운 학 한 마리 긴 울음
위세와 힘으로 굽힐 수 없었고 /부귀로도 더럽힐 수 없으니
뉘 알랴 나아가고 물러설 줄 아는 고결한 인품이 / 도리어 총림(叢林) 속에 있었던 것을
내가 와서 스님을 찾았더니 /구름 흩어지고 학은 묘연한 채
오직 한 조각 그림만 남았으니 / 어찌 칠분(七分)이나 닮았으랴
/아득한 저 허공 너머에서 마음으로 깨닫고 정신으로 만나리라.
이러한 몇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가 핍박받던 시대에 예외적으로 고위관료나, 유학자, 예술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동화사 조사전에 있는 진영(眞影,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61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고, 귀부를 봉황으로 형상화한 인악당이라는 비각이 있으며 부도가 용연사 적멸보궁 옆 마당에 있다. 용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더불어 향토 달성 출신이자 조선 후기 우리나라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고승 인악대사의 혼이 깃든 곳이다. 시대가 앞선 것인지 뒤인지 알 수 없으나 그곳에 지기와 풍우를 맞으며 묵묵히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는 이 모든 일을 기억할 것으로 생각하면 비록 한그루 고목에 불과하지만 그 경건한 자태에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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