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한훤당 김굉필 선생 고택의 소나무

이정웅 2017. 9. 19. 05:45

 

 

한훤당 고택 사랑채 앞의 소나무

 

한훤당 고택 안채

 

스스로 소학동자라 했다.

 

한훤당 고택 사랑채

 

한훤당 고택 일주문

 

한훤당 김굉필 선생 고택의 소나무

달성군은 대구의 보배다 구지국가공단이 대구의 새로운 부(富)를 창출하는 곳이 될 것이기도 하지만 유형무형의 많은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풍부한 것도 그 하나이다. 영남의 명가(名家)가 자리 잡은 곳은 공교롭게도 3골이다 그 중에서 2골이 달성군에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손을 보존한 취금헌 박팽년(1417~1456)선생의 후손들의 집성촌인 묘골이 그 하나이고, 동방 오현(五賢)의 수현(首賢)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종가가 있는 못골이 그 둘로 이는 모두 달성군에 있으며 조선후기 영남의 3노(三老) 중의 한분인 백불암 최흥원(1705~1786)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옻골이 그 셋으로 동구에 있다. 특히, 한훤당은 길재-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을 조광조에게 전수해 맥을 잇게 한 분이다.

현풍 나들목에 내려서 진주로 가는 국도에서 오른 쪽으로 진입하면 왼쪽으로 구 국도는 솔례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못골 즉 지동(池洞)로 간다. 다시 말해서 십이정려각을 마주보고 오른 쪽 길이다.

한훤당 선생의 11세손 김정제(金鼎濟)가 1779년(정조 3) 터를 잡으려고 하니 일대는 나비형상으로 못을 파야 허함을 보완해 명당이 될 수 있다하여 못을 파니 오늘날의 이름 지동은 그래서 부쳐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특징적인 나무 몇 그루가 있다. 우선 못 안 둑에 자리한 5그루의 느티나무다. 특별한 설명이 없으나 못을 파고 마을이 외부로부터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한 비보숲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느티나무 뿌리가 얼개처럼 왕성해 흙을 고정하여 못 둑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한 호안림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곳이 하천처럼 큰물이 지면 범람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비보숲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또 한훤당 고택 앞의 수령 150여년 되는 큰 잘생긴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서있는 것도 이채롭다.

유학의 종조(宗祖) 공자의 행단에서 비롯한 나무인 만큼 이곳이 유학을 계승한 조선의 유학자의 집이라는 것을 표상(表象)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택 들어가기 전 일주문 앞에는 오래된 고매(古梅)도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물 4가지 즉 사군자로 불리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 중에서 하나이다.

사랑채 앞 연못 주변에는 가지가 잘 굽은 노송 한 그루가 있다. 소나무 역시 선비들로부터 사랑받는 나무이다. 혹한에도 푸름을 잃지 않아 절개를 상징 한다는 이유이다.

그 연원 역시 유학과 관련되어있다. 즉 공자의 말씀을 정리한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 즉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낙엽이 지는 것을 안다는 뜻에서 소나무가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이 구절을 가장 적절히 활용한 분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 그의 일생일대의 역작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가 말하고 있다. 명문의 후손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바다 건너 오다가다 물고기 밥이 될지도 모르는 험난한 뱃길인 귀양지 제주에서 쓸쓸하게 보낼 때 그와 교분이 있던 사람 하나같이 돌아섰지만 오로지 제자 이상적(李尙迪)만이 의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 그려 준 그림이다. 시련의 고통이 향기로 승화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그린 그림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이 <세한도>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송백(松柏)에 대해 “소나무와 잣나무”를 이르는 말로 번역하고 있으나 식물학자 박상진 교수의 경우 “소나무와 측백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백(柏)을 어학사전에서는 측백나무 또는 잣나무로 번역하나 중국에는 만주 등 동북지방에서만 잣나무가 자생할 뿐 공자가 태어나고 활동한 산동성지 방에는 없다고 한다. 실제 곡부시의 가로수도 측백나무가 많고 대성전이 있는 공묘(孔廟)의 많은 나무들 중에도 측백나무가 무성하다.

한훤종택의 소나무 역시 유학자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도학정신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한훤당의 “노방송(路傍松)”이라는 시가 전해 온다.

 

노송 하나 푸르게 길가에 서 있어,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오가는 길손을 수고로이 맞이한다. (勞勞迎送往來賓) 노로영송일로빈

추운 겨울 너와 같이 변치 않는 맘가짐을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지나 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이 시에서도 세한(歲寒)이라는 말과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소나무의 푸름에 빗대 노래했다. 한훤당은 서울 태생이지만 증조부가 처의 고향 현풍에 정착했고 그 역시 인근 합천 야로로 장가들어 처가에 살면서 지은 집 당호 한훤당(寒暄堂)을 자호로 썼다.29세에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고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41세 되던 해 경상감사의 천거로 벼슬에 나아간 것을 볼 때 장가 든 19세 전후부터 출사한 41세까지 청장년시절 20여 년간 주로 합천과 현풍일대에서 활동했던 것 같다.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남부참봉에 제수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전라도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1517년(중종 12) 정광필·신용개·김전(金詮) 등에 의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고 1575년 다시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 졌다.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사우(師友)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여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를 강조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이장곤·김정국·이장길·이적(李勣)·최충성·박한공·윤신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종가에는 연로한 김병의 씨가 지키고 있다. 한 때 넓은 종택에 작약을 재배하여 모 대학에 조경용으로 팔아준 일이 있다. 그러나 당일에는 만날 수 없어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