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목정(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
하목정의 배롱나무군락
전양군 이익필 사당
덧서까래(부연)
인조의 친필 하목당
하목정 벽에 걸린 시판
전의인 낙포 이종문선생과 하목정 배롱나무
7월 하순과 8월 초순은 배롱나무 즉 백일홍(百日紅)의 계절이다. 꽃이 귀한 이즈음 검붉게 피는 꽃이 산하를 물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경수로 많이 심기고 있지만 옛날에는 매우 귀한 나무였다.
고건축과는 너무나 잘 어울려 담양의 명옥헌과 안동의 병산서원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대구에서 그런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전양군 사당의 큰 배롱나무를 비롯한 하목정(霞鶩亭,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일대이다. 이정자는 1604년(선조 37)경 전의인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8)이 창건했다.
전의 이씨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 본향이다. 그곳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대구에서도 많은 그 못지않아 충의로 나라에 공헌하고 학문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한 인사가 배출되었다.
특히, 전의 이문의 낙동강가의 하목정(霞鶩亭)과 금호강가에 부강정은 대구 사림의 사교와 시회를 여는 장소로 강안문학를 꽃피우게 했다.
이들이 처음 대구에 자리 잡은 것은 이필(李佖)로부터 비롯되었다. 경기도 부평(현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서 태어나 예산현감을 지내고 명종 조 달성군 하빈 하산리로 이거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분은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었다. 공은 임란 시 망우당 휘하에서 화왕산성을 지킨 아버지 경두(慶斗)와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1566년(명종 21)태어났다. 부인은 퇴계 문인 계동 전경창의 따님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임란 시 서사원, 손처눌, 이주 등과 팔공산에서 창의하여 하빈 서면대장으로 활동하여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금화사(禁火司) 별좌를 시작으로 제용감 직장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외직으로 1610년(광해군 2) 삼가, 1612년(광해군 4) 비안, 1620(광해군 12) 양성, 이듬해 군위현감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1638년(인조 16) 돌아가시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낙포집>이 있다. 맏이 이지영과 둘째 이지화가 대과에 급제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후손들은 하빈면 하산리, 동곡리, 기곡리,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다사면 부곡리 등 낙동강 좌, 우안에 세거하고 있다.
하목정은 여느 정자와 달리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던 곳으로 왕이 숙박을 한 정자로서는 대구에서 유일한 곳이다.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 지영이 출사하여 인조를 접견했을 때 하목정에 머문 이야기를 하면서 덧서까래(附椽)를 달지 않는 까닭을 물자 사가(私家)에서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자 내탕금(內帑金) 200냥을 주면서 달도록 하고 하목당이라는 글씨도 써 주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정(丁)자형이다. 정자 내부에는 이덕형, 채제공, 김명석, 남용익 등 이름 난 문사들이 쓴 많은 시문이 걸려있다.
대경대학 조영화, 부산대학 이호열 교수는 ‘조선 중후기 반가(班家)의 객청(客廳)으로 건축기법과 공간구성 및 장식 등에 큰 특징이 있는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북쪽에 하옹(霞翁) 이익필(李益馝, 1674~1751)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1703년(숙종 29) 무과로 등과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 시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죽산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무과 출신답지 않게 시문에도 능해 하목당 16경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하산에 자리 잡은 전의 이문은 이지영, 이지화 이외에도 길주목사 구(球), 하동현감 현(玹), 자인현감 여주(汝柱) , 사헌부 지평 관후(觀厚), 등 문과 급제자 8명, 전양군 외 무과급제자 13명, 낙포를 비롯해 생원, 진사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여 대구지역 명문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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