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선생 초상화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당 내 향나무
도산서당
도산서원 강당
공자가 심은 나무가 새로 싹이 터서 자란 회나무
1732년(옹정 10) 세운 안내판
겸쟁 정선의 계상정거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성역화를 마치고 기념으로 심은 금송
당초 1000원 짜리 지폐의 뒷면(위)과 현재의 뒷면(아래)
문순공 퇴계 이황선생과 도산서원 향나무
2016년 11월 20일 도산서원을 찾았다. 몇 번 가본 곳이지만 이번에는 혼자 갖다. 찬찬히 살펴보며 두 가지 사항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첫째는 성호 이익(李瀷)이 1711년(숙종 37) 경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선생이 직접 길렀던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를 어루만지며 훗날 사람들이 감당나무에 비의(比擬,견주어 비교함 )했다는 그 나무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알고 싶었고, 두 번째는 몇 년 전 모(某) 스님이 성역화 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은 금송(金松)이 원산지가 일본이며 그때 심은 것은 죽고 새로 심은 것이기 때문에 뽑아내야한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를 보고 실제로 뽑혔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금송은 1,000원짜리 지폐의 뒷면에서도 보였는데 스님의 문제제기로 논란이 있자 겸재(謙齋) 정선(鄭歚)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로 바꾸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도산서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로 고금을 통해 많은 선비들이 추앙하는 퇴계 이황을 기리는 서원이다. 따라서 조경도 그에 걸맞았을 것이나 경내에 어떤 나무들을 심었는지 알만한 배식도(培植圖)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서원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왕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영조, 정조 등 호학(好學)군주였던 그들은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겸재가 그린 “계상전거도”와 1751년(영조 27)에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도산서원도(보물 제522호)”뿐이다. 그러나 이 그림들 역시 주변의 풍광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어 심은 나무를 파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선생은 100여 수의 매화시를 남길 만큼 매화를 사랑했으며, 특히, 단양 군수 직을 마치고 떠나올 때 관기 두향(杜香)이 준 매화를 도산에 심고 가꾸었던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이상희(전 내무부, 건설부장관)의 역저 <매화>에 의하면 1996년까지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매화나무는 1970년대 성역화 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다만 성호의 글 “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즉 도산서원 방문기를 통해서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는데 성호는 이 글에서 “--잠시 있다가 금생(琴生)과 함께 간 곳이 도산서당인데 이곳은 선생이 직접 지은 곳이라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어리도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했다. ---왼쪽에서부터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이 모두 한 아름 되었다. 물어보니 선생이 손수 기른 것이라고 한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벌써 140년이 되었는데 나무만은 여전히 무성하게 남아 있으니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무에 흙을 북돋아주고 감당(甘棠)에 비의(比擬)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했다.
감당 비의란 시경(詩經)의 “제1편 국풍(國風)”의 주(周)나라 소공(召公)에 얽힌 이야기를 말 한다.
소공 석(奭)은 주(周)나라 성왕 재임 시의 수령으로 감당(甘棠, 팥배나무)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공정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후대 사람들도 선정을 생각할 때에 소공이 앉자 있었던 감당나무를 마치 그를 대하듯 좋아하며 그의 선정을 기렸다는데서 유래 한다. 이때에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곧 시경 소남(召南) 조에 나오는 “감당” 노래이다.
그러나 2016년에 찾은 도산서당에는 성호가 어루만졌다는 소나무와 전나무는 보이지 않고 회양목과 향나무가 각기 한 그루, 서당 밖에 문제의 금송(金松)이 건재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성호(星湖)가 후세 사람들이 선생이 심은 나무를 감당나무에 비의했던 나무는 서당 내 정우당(淨友堂, 연못) 옆의 향나무가 아닌가 한다. 원문의 한자 송회(松檜)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아니라 소나무와 향나무를 말한다. “회(檜)”는 자전에서 노송나무, 회목(檜木)이라고 할 때에는 전나무라고 번역하나 실제로는 “향나무”이다. 이는 중국 곡부의 공묘(孔廟)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심은 나무에서 새로 가지가 돋아나자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라고 1732년(옹정 10) 표석을 세워 놓은 나무는 향나무이다.
그러나 서당을 짓고 선생이 심었다고 보기에는 수령과 크기가 못 미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점은 척박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둥치는 죽고 맹아(萌芽)가 자란 것일 수도 있다. 특별히 선생이 회(檜) 즉 향나무를 심은 이유는 스스로 유학의 종조 공자의 학문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태어난 온혜의 집 당호 노송정(老松亭)의 노송(老松) 역시 오래된 소나무가 아니라 노송나무 즉 회(檜)나무의 우리식 표현이라는 점이 이 상상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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