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원종1등공신 양무공 이언춘
경북대학교 홍성천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 방송국에서 신라 제4대 석탈해왕 능원(陵園)의 소나무가 묘소를 향해 엎드려 자라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시청자의 제보가 있어 촬영하러 가자고 하는데 동행하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방송국 관계자, 홍 교수, 주민이 인터뷰하는 사이에 한 어르신이 찾아와 『동계실기(東溪實記)』를 보여주면서 취재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았으나 미리 협의한 사항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옆에 있든 필자가 그 책을 받았다. 그해가 2008년 즉 지금부터 12년 전이다. 어느 날 서가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때 받은 책을 발견하니 문득 그때 훌륭한 조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워하던 어르신이 생각났다. 비록 늦었지만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을 건너 준 어른은 선무원종1등공신 동계(東溪) 이언춘(李彦春)의 14대 주손 이성희(李聖熙)였다. 공신 동계의 본관은 경주로 한성판윤을 지낸 지대(之帶)의 6대손이며 훈련원정 안국(安國)의 아들로 1546년(명종 원년) 경주 동천동에서 태어났다. 임란이 발발하자 알동재(閼東齋) 훈장으로 있던 공은 제자와 더불어 창의하니 모인 사람이 모두 149인이었다. 공은 이들에게 쇠붙이를 모아 창과 칼을, 부인 안동권씨에게는 군복과 군기(軍旗)를 만들게 했다.
이어 이시량(李時良)을 좌장(左將), 아들 상립(尙立)을 우장(右將)으로 삼아 1592년 4월 23일 울산 개운포 전투에서 의병장 윤홍명, 이응준, 장희춘 등과 합동작전을 펼치고 백운암에서 적을 격퇴했다. 이어 5월 19일 울산 달현전투에서 야간을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12월 14일에는 박인국, 은진현감 이여량 등과 원원사(遠願寺)에 모여 화살을 만드는 중에 침입한 왜적을 격전 끝에 7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6년(선조 29) 3월 3일 멀리는 전라도 강진으로부터 가까이는 대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70개 읍 485명이 의병장들이 팔공산에 모여 국난극복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소위 “팔공산회맹(八公山 會盟)”에 공은 아들 상립과 함께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의병장들의 출신 지역과 이름을 기록한 <팔공산열읍제의장 제명록(八公山列邑諸義將 題名錄)>을 작성했다.
이 제명록 등에 의하면 대구에서는 민겸(閔謙), 박충윤(朴忠胤), 박충후(朴忠後), 배덕일(裵德馹), 서승후(徐承後), 성락선(成樂善), 손처약(孫處約), 이경배(李景培), 이종택(李宗澤), 채몽연(蔡夢硯), 최동보(崔東輔), 최인(崔認), 황경림(黃慶霖) 등 14명, 현풍에서는 곽재기(郭再祺), 김응현(金應賢), 박성(朴惺), 채원우(蔡元祐) 등 4명 모두 18명이 참가했다. 이 기록물은 팔공산 지역의 임란사(壬亂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수천 명의 왜적이 팔공산에 진을 치고 있자 공은 아들 상립, 남득의, 이준, 박회무, 이시발, 문희성, 박태회 등 8인과 이눌, 이여량, 박인국, 의흥현감 이대기, 신녕현김 손기양, 의성 현감 여대로 등과 함께 적을 포위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고 103명의 수급을 베고, 왜창(倭槍) 80자루, 칼 107자루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공은 포로로 잡은 왜인 2명을 첩자로 활용하여 정보를 얻고, 안의(安義)에서 3만 명, 상선(尙善)으로부터 2만 명, 경울(慶蔚)에서 2만 명의 지원군이 온다며 적들이 잘 보이는 요소요소에 큰 깃발을 세워 이를 본 적들이 지레 겁을 먹고 사기가 떨진 틈을 타 공격하는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전쟁 후 그동안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감회(感懷)를 한 편의 시로 남겼다.
八公山頭 草木風 飄飄乎 烈烈乎 如泣如訴 抱劒忠
팔공산 산머리 초목에 부는 바람, 가볍게 불다가 세차게 부는구나.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니 칼 안고 있는 충성스러운 장사(壯士) 모습이네
太和江 嗚咽水 滔滔乎 洋洋乎 忠壯士 胸中 烈烈風 洋洋水 萬古長
태화강 목메어 울며 흐르는 물, 광대(廣大)하고 성대(盛大)하구나. 충성스러운 장사(壯士) 가슴 속 세찬 바람에 성대(盛大)한 물 만고(萬古)에 흐르리
1599년 (선조 32)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주부에 제수 되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되고, 양무(良武)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609년(광해군 1) 전상(戰傷)으로 돌아가시니 양무사(良武祠)를 세워 기리고 있다. 부자(父子)가 함께 창의한 것도 특별한 일이지만 정유재란 때 팔공산 일대의 치열한 싸움은 공의 『동계실기(東溪實記)』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고, 공이 남긴 <팔공산열읍제의장 제명록 즉 <팔공산회맹록>은 당시 각 지역의 의병장 면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 점은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정리하면서 무엇보다 기쁜 일은 12년 전 만났던 동계공의 이성희 주손이 92세의 나이에도 건강하게 양무사를 지키고 있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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