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이영(李英), 이괄의 난에 창의한 채선견(蔡先見), 유학자 최흥원(崔興遠)의 현양비와 6·25 및 월남참전유공자기념비를 세우는 등 공산지역 정체성 찾기에 오래 활동해온 김태락 전 동화집단시설지구 번영회장이 2021년 8월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 기념비를 세우고 싶다며 도면과 비문을 보냈더니 2개월여 후인 10월 18일 생가에서 제막식을 하는 데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하여 기꺼이 참석했다.
빗돌 만들기부터 제막식 행사까지 혼자 하다시피 한 김 회장은 새길 내용과 넣을 문구(文句)에 많은 고심을 했다. 즉 생각이 다른 사람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가장 대표적인 업적을 담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북방정책의 성과를 내 세우려고 고르바초프와 만나는 장면을 선택했으나 그 역시 적당치 못하다 하여 88올림픽으로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축제는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는 단군 이래 가장 큰 국제행사였다. 비석은 두 개였다. 하나는 생가 출입문 오른쪽에 노 대통령이 오른손을 들어 대중을 반기는 친근한 모습과 88올림픽 슬로건 “세계는 서울로·서울은 세계로”와 함께 오륜기를 새겼고, 뒷면에는 자당이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는 모습에 이해인 시인의 “엄마의 고운 음성·맑고 그윽한 기도의 향기”로 채웠으며, 안마당의 빗돌에는 “민주화를 연 노태우 대통령업적”이라는 제하(題下)에 ‘6.29 선언, 남북한 동시유엔가입, 인천국제공항착공, KTX 건설, 주택 200만 호 건설’ 등 대표적인 공적 몇 가지를 적어 놓았다.
아드님 노재헌 변호사·정해용 대구시 경제부시장·차수환 동구의회 의장·배기철 동구청장 등 내빈과 주민 20여 명이 참석한 아주 조촐한 행사였다. 노 변호사는 고맙다는 말과 더불어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님께 사진을 보여드렸다고 했다. 너무 조촐하여 마음이 착잡했다.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사후 행사에도 TV 화면이 가득 차고 신문이 대서특필하는 다른 대통령의 행사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8일 후 10월 26일 향년 89세로 그것도 당신께서 존경해마지 않으시던 박정희 대통령의 기일에 영면하셨다. 비록 제막식을 보지 못했으나 당신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11월 19일 다시 김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 변호사가 아버님 장례를 잘 치렀다며 인사차 오니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했다. 식후 노 변호사의 인사말을 들었다. 김 회장의 주선으로 몇 분이 상주를 위로하고 고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득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노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 시절이었다. 그때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해 모내기를 하지 못했다. 공산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쌀 생산에 정부가 전 행정력을 기울일 때였다.
대구시에서는 관정(管井, 지하수를 이용하기 위하여 둘레를 대롱 모양으로 만든 우물)을 파기로 했다. 수질 전문가를 초빙하여 조사했으나, 예상과 달리 지하수가 충분치 않았다.
이런 여건을 고려하여 벼농사를 대신해 과수 등을 재배하도록 밭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러나 쌀이 모자라던 당시 논을 밭으로 바꾸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때 내무부는 각 시도의 어려움을 해당 부처(部處)와 협의하여 해결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노 장관이 고향 사람들의 애로를 충분히 들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농림부의 승인을 받았음은 물론 한발 더 나아가 농촌진흥청이 나서서 토양 검사를 하고 적합한 품종을 선발하도록 했다. 그 결과 포도와 복숭아가 추천되었다. 묘목 대금은 시가 지원하고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가 재배법교육을 담당했다. 이런 연유로 순환도로를 주행하다가 만나는 달콤한 “팔공산 포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해발 400m 정도라 출하 시기가 평지 포도보다 늦어 도매시장에서도 한 시세 더 받았다. 이 전전한(田轉換) 사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노태우 대통령의 작은 업적이다.
그 후 팔공산공원관리사무소로 자리를 옮겨 자연보호와 시설물 관리 등으로 순찰이 잦았다. 그때 만난 사람 중에 어떤 분이 생가 뒷산이 순환도로건설로 맥이 끊어져 대통령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 달리 1987년 개헌 이후 치러진 첫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다시 시로 자리를 옮겨 녹지과에 있을 때 파계사 부근에 산불이 났다. 빨리 끄지 않으면 팔공산 전체로 번질 위급한 상황이었다. 시와 구청, 소방공무원 동원은 물론 주민들도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쉽게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노 대통령 부친 묘소와 발화(發火) 지점이 표시된 지도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다. 화재 지역과 멀리 떨어져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지도도 그려 보냈다. 대형 산림청 소방헬기를 지원받는 한편, 포항 해병대 사령부에 헬기를 요청해 진화를 마무리했다. 그 후 언론에 대통령 부친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군 헬기까지 동원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誤報)로 평소 산불 발생 시 취하는 재난방지 시스템을 활용했을 뿐이다.
팔공산의 한 지맥이 내려온 곳에 자리 잡은 생가는 명당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안채 북쪽에는 봉황이 깃든다는 오동나무가 있고, 뒤 안에 길상의 동물인 거북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입구 옆에 큰 감나무가 있는데 그곳의 문화관광해설사가 “장군나무”로 팻말을 붙였다. 모친이 감을 내다 팔아 그 돈으로 학비를 보태 장군이 된 일화를 소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산업화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한 중심에 서서 과도 있었지만, 사후 평가는 긍정적인 점이 더 많았다.
풍수상 팔공산은 천황제일봉(天皇第一峯)은 제산지상((帝山之像) 즉 임금이 태어날 형상이고, 성현배출공경임립(聖賢輩出公卿林立), 성현과 높은 벼슬아치가 수풀처럼 배출되고, 천백년부식국강배양풍화자진출(千百年扶植國綱培養風化者盡出) 천 년에 걸쳐 국가의 기둥이 될 인재가 나올 곳이라고 한다. 『조선의 풍수 촌산지춘(村山智順), 최길성 역, 228쪽』
“보통사람”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은 본인의 노력이 컸겠지만, 팔공산 정기도 더했다. 생가기념사업에 이어 추가로 더 할 것이 있다면 용진마을에서 공산초등학교까지 가칭 “노태우 길”을 개설했으면 한다, 소년 노태우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산초등학교를 다니던 길이다. 당신께서 육사에서 축구와 럭비선수로 뛸 만큼 강건한 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학교를 파하고 저녁녘 귀가할 때 산짐승이 무서워서 뛰어다닌 결과라고 했다.
우리 청소년들이 이 길을 걸으며 호연지기를 키워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었으면 한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김유신이 팔공산에서 기인 난승(難勝)을 만나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해 받았고, 그 천년 후 태어난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통일을 위해 1988년 7월 7일 남북공동선언, 6 개항 이른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하여 평화통일의 초석을 놓았으며 돌아가셨어도 당신 재임 시에 실향민을 위해 조성한 파주의 통일동산 북녘땅이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못다 한 남북통일의 유업을 이을 또 다른 노태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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