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과 대구

이정웅 2021. 10. 11. 16:40

대구 동구 도동 소재 최치원 선생영정

 

 

고운 선생이 머물던 선사암 자리에 지은 이강서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은 경주 출신으로 신라 최대의 문장가로 그 문명(文名)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일이다.

유불선(儒佛仙)을 통달한 학자였고 또 훌륭한 관리였다. 동방 18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모셔져 있다. 혹자는 조선의 최고 벼슬인 정승 10명보다 대제학 1명을 배출한 가문이 더 자랑스럽고, 대제학 10명보다 문묘에 모셔지는 1명이 있는 가문이 더 영광스럽다고 한다.

고운은 황소의 난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평정한 일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함양 태수로 근무할 때 시가지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만으로 목민관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는데 그 위에 조성한 상림(上林, 천연기념물)은 우리나라 최초로 나무를 심어 제방을 보호한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 호안림을 중심으로 주변에 아름다운 공간을 조성하여 지금은 함양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런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에 고운과 직간접 연고 있는 곳은 단지 그가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여겨 부산 해운대구는 최치원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고운의 동상을 세웠으며, 의성군은 최치원문학관을 건립했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주시가 최치원기념관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으로 그 도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여 기념하는 것은 고운(孤雲) 이라는 인물과 연관 지어 지역의 가치가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 고운은 세계 최강의 나라 당()의 관리로서 선진 문화와 문물, 제도를 경험한 분이다. 그가 귀국한 것은 기울어져 가는 조국 신라에 이러한 선진 제도를 도입해 다시 일으키려는 큰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꺼운 벽이 그를 가로막으니 스스로 외직을 자원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시무책 10조를 올렸으나 그것마저 채택되지 아니하자 관리 생활을 접고 명승지를 주유하다가 마침내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러나 최근 하동 사람들은 그가 입적한 곳이 하동의 법왕리 일대라고 한다. 그가 입산하면서 꽂은 지팡이 즉 푸조나무(경남기념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승들이 지팡이가 싹이 돋아 지금까지 자라고 있는 대표적인 나무가 정선의 정암사에 있다. 자장율사의 지팡이로 알려진 주목(朱木)이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나 고운의 지팡이 전설은 하동뿐만, 아니라 해인사에도 있으니 학사대 전나무 역시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을 두고도 서로 인연을 강조하는 것 역시 고운의 명성이 그 지역사회의 품격을 높이기 때문이다.

옻골 등에서 고운의 후예들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대구에도 고운과 관련된 유적이 있음에도 시민은 물론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의성 최치원문학관에 가서 더 절실하게 느꼈다.

전시실에는 고운 생전에 연고가 있는 곳을 지도에 표기해 놓았는데 대구는 빠져있었다. 한마디 하려 다가 대구사람도 잘 모르고 있는데 이곳 사람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싶어 포기하고 돌아섰다. 고운(孤雲)이 한때 대구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佛宇) 조 나온다. “선사암(仙槎菴)은 마천산에 있다. 암자 곁에 최치원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했고 이런 사실은 후대 사람들도 기억해 16세기 초 퇴계 이황의 제자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1517~?)은 같은 암자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층층 바위 가에 맑은 못 하나 / 數層巖畔一澄潭

학사 당 년에 놀던 풍취를 찾으니 / 學士當年恣意探

애석하구나 탄환처럼 좁은 곳이라 / 可惜彈丸疆界窄

선유의 종적 다만 하늘 남쪽이었네.” 仙遊蹤跡只天南

 

학사는 곧 고운을 말한다. 훗날 이곳에 대구지역 사림(士林)의 영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독서실로 완락당(玩樂堂)을 지었고 그의 사후에는 후학들이 이강서원(伊江書院)을 지었다.

일대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로 지금과 같이 개발되기 전에는 바다와 같은 곳이어서 신라왕들이 선유(船遊)를 즐겼다고 한다. 18세기 선비 서호(西湖) 도석규(都錫珪)도 일대를 중국의 서호에 빗대 서호병십곡(西湖屛十曲)”의 시를 쓴 데서도 알 수 있다. 산수를 사랑하는 고운이 즐길만한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만 그가 얼마 동안 그곳에 있었던지는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천년 후에 태어난 선비 서호의 고운을 기리는 마음을 앞서 소개한 그의 작품에 잘 나타냈다. 서호의 서호병십곡중 제3선사(仙槎)”는 다음과 같다.

 

세 굽이 난가대에 기대어 물으니 / 三曲欄柯倚問之

선사의 옛 자취 아는 이 드물구나 / 仙槎遺事罕能知

가야산에 들어간 사람 천 년 동안 소식 없으니 / 伽倻天載無消息

강가의 가을 은하수 장건(張騫)의 고사(古事)와 같구나. / 江上秋雲似漢時

 

또 하나 고운과 대구와의 관계는 나말(羅末) 대구지역의 호국의영도장( 護國義營都將)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와의 인연에서 알 수 있다. 이재가 대구지역의 맹주로 있는 기간은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거의 무너져 변방이 어지러울 때이다. 전주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반란을 도모한 때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이재는 신라를 지키기 위해 대구의 남령(南嶺, 연구산으로 비정)에 팔각등루(八角燈樓)를 건립하고 고운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받으니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이다. 이때 고운은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처지에 고운에게 기문을 받을 수 있었던 이재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908(효공왕 12) 등루의 준공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동화사의 홍순대덕(弘順大德)을 좌주(座主) 즉 최고 스님, 그 외에 태연대덕(泰然大德), 영달선대덕(靈達禪大德), 경적선대덕(景寂禪大德), 지념연선대덕(持念緣善大德), 흥륜사(興輪寺)의 융선주사(融善呪師) 등의 고승들이 참여하여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고운의 등루기에는 이재의 특별한 능력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부부가 독실한 불교 신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대구도 소개했는데

 

서쪽에 둑이 있는데, 이것을 불좌(佛佐)라 하며, 동남쪽으로는 불체(佛體)라는 못이 있고, 그 동쪽에 또 따로 천왕(天王)이라는 못이 있으며, 그 땅(坤維)에 옛 성이 있는데 이것을 달불(達佛)이라 하고, 성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또한 불()이라 한다. 명칭이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요, 이치상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환경이 이렇게 좋은 곳은 좋은 시기와 서로 맞게 된다.” 라고 표현했다.

 

당시 즉 10세기 초의 대구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구읍지에는 없는 지명이라서 향후 대구 지역사 즉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고운은 이렇게 대구와 직접 인연을 맺었다. 더 나아가 대구는 다른 지역과 달리 두 점의 고운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달서구 대곡의 대곡영당이 한 곳이요, 동구, 도동이 그 다른 한 곳이다. 그중에서 도동의 영정은 대구시 문화재(대구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만하면 고운과 대구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구도 고운(孤雲)을 보유한 문화도시이다. 그름에도 대내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고운의 등루기는 왕건과 견훤의 공산 전투에도 시사하는 바도 있다. 927(고려 태조 10) 왕건과 견훤의 공산 전투에 대해 왕건이 크게 패한 원인을 두고 동화사의 법맥(法脈)이 백제계의 전주 금산사에서 이어온 관계로 스님들이 친 백제계로 견훤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신라계 이재가 주관한 팔각등루 준공식에서 동화사 좌주와 여러 대덕(大德)이 참석하여 축하한 것을 보면 동화사 스님들은 오히려 이재의 후원하에 있었다. 따라서 비록 준공식이 있었던 해와 전쟁이 일어난 해가 19년이라는 시차가 있으나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동화사 승려가 친 백제계라는 어떤 문헌도 없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동화사 스님들이 왕건을 배척하고 견훤을 도왔다는 주장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