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도동 (대구시 동구)의 토박이 성씨

이정웅 2021. 6. 1. 05:55

청백리 이영 , 효자이자 성리학자인 서시립 , 임란 의병장 최인 , 곽재겸이 살았고 , 인조가 마을 이름을 하사한 대명동 ( 한이골 ) 이 있으며 , 곽재겸과 서시립 2 명은 대구십현이며 , 곽후창 , 최진남 , 최경식 등 3 명은 문과 급제자이고 , 이영은 무과 급제자이다 . 이런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도동은 조선 시대 대구의 대표적인 반촌 ( 班村 ) 이었다 .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를 측백나무숲이 자라는 자라는 향신

 

 

도동마을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경주최씨 광정공파(匡定公派) 대구 입향조 맹연(孟淵, 맹산 현감 역임)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명종 대에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선정된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이다.

그의 실기(實記)성종 25(1494) 2, 10일 해안현(解顏縣) 상향리(上香里) 에서 태어났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해안현은 오늘날 도평, 불로·봉무, 지저, 동촌, 방촌, 해안, 공산동 일대를 말하고, 상향리는 도평동의 법정동 도동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그가 상향리에 태어난 것은 아버지 이순손(李順孫)이 경주최씨 명연의 아들 한()의 딸과 결혼해서 처가 쪽에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두 집안 다 명문이다. 특히, 괘편당의 고조부 이보관(李甫款)은 지순흥군사(, 순흥군수)로 순흥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유배지 박천(博川)에서 교살된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의 아우이다.

이때 이보관은 형의 연좌로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팔공산으로 숨어드니 현재 그곳을 내동이다. 지금까지 후손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묘소도 그곳에 있고, 그를 기리는 청백사(淸白祠, 1729, 영조 5,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없음) 역시 내동 가까운 백안동에 세워졌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후 괘편당 이영은 외아들 두문(杜文)을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슬하에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다. 현풍의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을 사위로 맞으니 그 역시 처가에 들어와 현풍곽씨 도동 입향조가 되고, 괴헌의 아들, ()이 외가의 제사(祭祀)를 맡아 외손(外孫) 봉사(奉祀)했다.

한편 도동의 대표적인 인물 전귀당 서시립(徐時立)은 원래 도동 사람이 아니고 달성원북(達城院北, 원대?) 출신이나 백안동에 살다가 1626(인조 4)에 도동에 거처를 마련하니 도동 입향조가 되고, 일직인 손홍주의 아버지 잠이 전귀당 의 딸과 결혼하면서 역시 외가 도동에 자라 잡아 일직손씨 도동 입향조가 되었다.

1700년대 후반 대구빈씨 집안에서 서당 훈장으로 북구 관음동의 경주인 이이선(李爾善)을 모셔오니 그 또한 경주이씨 도동 입향조가 된다. 이런 연유로 도동은 경주최씨, 영천이씨, 달성서씨. 현풍곽씨 일직손씨, 경주이씨 등 명문(名門)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처가나 외가, 이사를 통해 도동에 들어와 자리 잡은 사람들과 달리 도동에 서재(書齋)를 열었던 한 분 있으니 본관을 어디로 하는지 모르는 진관(陳瓘)이다. 곽재겸의 손자 후창(後昌)서시립 행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숲 가에는 옛 처사(處士) 진관의 서재 터가 있었는데 공(서시립)께서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향내에는 배우려는 자가 많은데 공부할 곳이 없으니 여기에 몇 칸의 집을 지어 면학(勉學)하는 곳으로 삼기를 꾀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향인(鄕人)들이 이구동성으로 서로 호응하여 경영함으로써 그 일이 이루어졌다.” 한 것에서 전귀당이 오기 전부터 한때 진씨도 들어와 서재를 열고 살았던 것 같다.

한때 대구빈씨도 살았던 것 같다. 일설에는 여말 중국에서 귀화한 대구빈씨 시조 수성군(壽城君) 빈우광이 노년에 그가 처음 자리 잡았던 수성에서 팔공산으로 은거해 살았다고 하고, 실제로 후손이 도동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도동 산153번지에 대구빈씨 시조 빈우광의 신도비와 단소(壇所)가 세워졌다.

그가 고려로 올 때 17,000권의 서적을 가지고 와서 유학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도동에는 영천이씨도 대구빈씨도, 진씨도 없고 기존의 경주최씨, 달성서씨, 일직손씨와 경주이씨와 근래 외부에서 들어온 타성바지들이 함께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도우며 문화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세계 최고 갑부라는 쇼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일직인 손홍주의 후손으로 할아버지가 도동에 살다가 도일(渡日)하였으며 증조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손 회장이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다녀가기도 했다고 한다.

도동은 국보나 보물처럼 소중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가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자 조선 시대 문무를 겸비한 청백리 이영, 효자이자 성리학자인 서시립, 임란 의병장 최인, 곽재겸이 살았고, 인조가 마을 이름을 하사한 대명동(한이골)이 있으며, 곽재겸과 서시립 2명은 대구십현이며, 곽후창, 최진남, 최경식 등 3명은 문과 급제자이고, 이영은 무과 급제자이다. 이런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도동은 조선 시대 대구의 대표적인 반촌(班村) 이었다.